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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한국교회 정화 어렵다면 ‘기존’과 결별이 답이다

입력
2018.10.13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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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으로 된 한국 시골 교회의 모습. 1908~1922년 사이에 찍힌 것으로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초가집으로 된 한국 시골 교회의 모습. 1908~1922년 사이에 찍힌 것으로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결별은 새로운 출발이다. 목사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냥 결별하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은 커플이나 부부가 있기도 하다. 같이 있어서 긍정적인 발전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서로의 삶에 저해가 된다면, 결별은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이집트에 살던 히브리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했던 특단의 조치는 역시 결별을 경험케 하는 것이었다. 옛 체제 안에 있어서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같이 섞여 썩어들어 갈 것 같으면, 때어 내어야만 한다. 구약성서에서 ‘거룩’이라는 개념은 공교롭게도 ‘구별해 내다’는 뜻이다.

지난 몇 년간, 해마다 5, 6명가량의 새 신자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직접 담임 목회를 하지 않는 나에게는 무척 이례적이고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목회를 하는 동료들도 놀라워했는데, 일 년에 단 한 명이라도 새 신자가 되어 침례 혹은 세례를 받는 일이 근간의 한국교회에서는 드문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새 신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6년간 어느 대학 안에 있는 국제 학생들의 채플에서 설교를 하는 사역을 해 온 덕이었다.

미디어를 통해서 연일 쏟아지는 한국교회의 소식이 참 어둡다. 이제는 제 발로 교회를 찾아올 사람이 있을까 싶다. 반면, 미디어를 통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놀라운 일이 한국 기독교에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나라의 위상과 한류 바람 덕에 수많은 외국학생이 한국 대학으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마침 그동안 열렬히 성장해온 교회 덕에, 한국 대학에는 기독교인 교수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목회자는 아니지만 대학의 수많은 기독교 교원들은, 고향을 떠나 한국에 온 곤고한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보살핌을 줄 수 있게 되었다. 미디어로 접하는 한국교회의 어두운 그림자와는 달리, 여전히 한국의 복음화 운동은 뜨겁게 진행되어 가고 있다. 밖으로 나가기만 하던 선교에 신선한 충격이기도 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곳저곳에 이미 대안 목회라는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인 개신교 교회의 목회 양식으로부터 결별하여 시도하는 실험적 목회다. 그중에 제일 많이 목격했던 것은, 목회자가 주중에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주말에는 목회를 하는 방식이었다. 자기가 운영하는 카페나 레스토랑, 병원, 사무실 등이 주말에는 교회로 변모하기도 한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많은 이들의 연구대상이 되었을 정도로 놀라운 발전이었다. 기독교 문화에 있어서는 미국 다음이 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만큼 한국교회는 크고 강하다. 그러나 이렇게 부강한 한국교회는 기원전 8세기의 이스라엘을 생각나게 한다.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적으로 큰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예언자들로부터 무섭게 질타를 받았다. 그 예언자들의 글을 읽으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심판을 부르는 그들의 선포가 당시 이스라엘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교회에 내리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특히 예언자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을 무섭게 질타했다. 당시 종교는 인간 사회 맨 꼭대기 위에 있는 샘물과도 같았다. 종교가 타락하면, 온 사회는 오염된 샘물을 마시게 된다. 신정정치를 하지 않는 지금 우리 사회에 빗대어 보는 것이 적절치 않을 수도 있으나, 교회가 돈 문제로 극심하게 타락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징조다. 분명 사회 각 분야에 걸쳐 함께 곪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재앙에 가까웠던 세월호 참사는 한국 부패상의 종합 세트였다. 정치인과 정부, 공무원, 기업인 그리고 아리송한 종교 집단까지 함께 얽혀 있었다.

기독교에서 파생한 여러 이단 단체들도 우리 사회에서 극성이다. 전통 교회는 독특한 신학 사상을 문제 삼아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다. 그런데, 교리를 잘 모르는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잘 알려진 이단들이나 기존의 정통 교회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특히나 탐욕의 문제로 스캔들을 일으키는 부분은 똑같다. 정통 교회나 이단이나 서로 그리 멀지 않은 형제 같아 보인다.

그런 면에서, 한국 기독교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안적 교회들이 꼭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어주길 기대한다. 물론 이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교회 형태를 전통 교회는 꽤 불편해할 것이다. 하지만 변화를 일으키려면 불가피하다.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초대 기독교 교회의 시작도 그와 같았다.

당시, 예수의 사도들은 아직 옛 유대교의 일원들이었다. 하지만 성령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그들에게 임했던 오순절 사건 이후부터 그들은 새로워졌다. 새로워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옛 유대교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오후 세 시의 기도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사도행전 3:1) 새로워진 것은 급진적인 그들의 삶이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사도행전 2:44-47)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들의 모임을 하나님이 성장시켜 주었다고 한다. 바로 그 앞의 표현이 눈에 띈다. 사회에서 보기에 그들은 ‘호감형’이었다. 뉴스에서 날마다 교회를 칭찬하는 소식이 나왔다는 격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어떻게 하면 비호감을 탈피하여 날마다 새 신자가 늘어나는 호감형이 될 수 있는지, 위 사도행전 본문은 잘 알려준다.

강한 종교적 운동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받기는 좀처럼 어렵다. 종교 안에서 벌어지는 낯선 일들은 사람들을 두렵게까지 한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2:43) 이렇게 당혹스러운 일들이 일어나자, “다른 사람들은 누구 하나, 감히 그들의 모임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백성은 그들을 칭찬하였다. 믿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면서, 주님께로 나아오니, 남녀 신도들이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5:12-14) 이 보고도 마찬가지 공식을 보여 준다. 그들이 새 신자들과 함께 크게 성장하기 전, 사회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로부터 칭찬과 호감을 받는 신자들은, 불가피하게 자신이 속한 종교 조직인 유대교와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서로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체제 내부에 긍정적인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결국 결별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대교와 결별했던 예수의 제자들이 기독교를 탄생시켰다. 중세 유럽의 구교가 타락하여 침전물이 쌓여 올라 갈 때, 에라스무스는 내부적 개혁이 진전되어 가길 바랐으나 마르틴 루터는 급진적 결별을 추구했다. 역사의 선택은 결별이었다. 그리고는 지금의 개신교가 출발할 수 있었다.

루카스 크라나흐 작 마르틴 루터(1533). 중세 유럽의 구교가 타락할 때 그는 급진적 결별을 추구했다.
루카스 크라나흐 작 마르틴 루터(1533). 중세 유럽의 구교가 타락할 때 그는 급진적 결별을 추구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500년의 시간이 흘렀다. 현재 이 개신교 운동의 대표적 산물은 한국 기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한 번의 종교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을까? 악취를 맡으면서도 탐욕의 손을 놓지 못할 지경이라면, 교회 스스로의 정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아마 필연적으로 결별할 것이다. 거룩은 분리하는 것이며, 분리만이 신선한 채소가 상한 채소들과 같이 썩는 것을 막는 길이다.

예수께서 하셨던 어느 비유가 떠오른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떼어내서, 낡은 옷에다가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다가 넣는 사람은 없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누가복음 5:36-38)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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