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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27.5원의 효용

입력
2018.10.11 18:2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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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채널을 ‘돌리던’ 시절, 난 아무리 광고가 길어도 채널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엉덩이가 너무 무거웠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광고가 아니었지만, 광고가 끝날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렸다. 리모컨이 생긴 다음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광고가 시작되면 채널을 돌렸다. 나 같은 시청자가 너무 많았는지, 어느 날 PPL(Product Placement) 광고가 등장했다. PPL을 보지 않으려면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속삭이다가 갑자기 “이 음료수 너무 맛있지 않니?”라고 말하는 건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PPL도 조금씩 세련되어 갔고, 이런 광고가 있어야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PPL에 대해 관대해졌다. 웬만한 PPL에는 관대한 시대지만, 프로그램의 흐름을 완전히 깨는 생뚱맞은 PPL에는 여전히 비판이 쏟아진다. 시청자들이 다른 광고에 비해 유독 PPL에 크게 반응하는 이유는 광고가 프로그램의 본질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광고는 피할 방법이 없다. 지하철 승객이라면 누구나 봐야하는 지하철역의 광고는 PPL을 닮았다. 지하철역의 광고는 본질을 훼손하기도 하고, 피할 수도 없고, 지하철 운영에 도움을 준다.

얼마 전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하철역의 광고를 모두 없애고 예술작품으로 바꾸자”는 말을 했다며 논란이 일었다. 찬성하는 측은 무차별적인 광고로 인한 눈과 정신의 피로를 호소한다. 상업광고 없이 예술작품을 건 신설동역에 대한 반응도 좋다. 반대하는 측은 적자인 서울교통공사가 연 440억원의 광고수익을 포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한다. 찬성도 반대도 모두 일리가 있지만, 지하철역 광고를 이대로 둬도 좋을지는 한번 생각해 볼만 하다.

지하철역 광고는 때로 본질을 훼손한다. 대표적인 것이 지하철역 주변 안내도이다. 지하철역 주변 안내도의 역할은 보행자가 목적지를 잘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안내도는 보행자의 편의가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하지만, 보행자의 편의보다 광고비용을 낼 수 있는가가 안내판 설치의 기준이 되고 있다. 몇몇 공공시설과 광고비를 낸 가게와 병원, 학원 등이 안내판을 차지하고 있다. 광고계약이 끝난 가게는 스티커로 붙여 놓아 안내판이 너덜너덜하다. 그리고 하단에는 ‘출구 표시 문의’ 또는 ‘광고 문의’라는 글과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주변 안내도가 아니라 주변 광고판이다.

지하철역 광고는 피할 수도 없으면서 너무 많다. 스크린도어, 벽면, 기둥, 지하철 접근을 알리는 전광판, 에스컬레이터 손잡이, 재난 시 이용물품을 모아 놓은 보관함, 개찰구 봉, 자동판매기 측면, 승차권 발매기 상부 등 가능한 모든 공간이 광고판으로 쓰인다. 게다가 요즘에는 눈에 잘 띄게 하려는지, 똑같은 광고로 도배하는 경우도 많다. 눈과 정신의 피로를 호소할 만 하다.

하지만 우리는 광고를 보는 덕분에 440억원 만큼 요금을 덜 내며 지하철을 탄다. 광고 없는 지하철역을 원한다면 그만큼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세계 최대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올라오는 동영상을 우리가 무료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광고를 보기 때문이다. 광고 덕분에 무료로 동영상을 보지만 동영상 앞, 뒤, 중간에 나오는 광고는 성가신 존재다. 광고를 보지 않으려면 월 7,900원을 더 내고 광고 없는 프리미엄 서비스에 가입하면 된다.

지하철역 광고를 몽땅 없앨 필요는 없지만, 만약 광고 없는 지하철역을 만들어 공간을 비워두거나 다른 용도로 활용한다면 우리가 내야 하는 프리미엄 서비스 비용은 얼마일까? 2017년, 무임승차를 제외한 서울지하철 탑승객의 수는 약 16억명이다. 440억원을 부담하려면 회당 27.5원의 요금을 더 내야 한다. 낼 만한가?

최성용 도시생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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