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정무위원회. 오대근 기자

금융사 광고 중에서도 보험사 TV 광고는 유독 멋을 부린 게 많다. ‘평생 일한 당신, 보험이 이제 당신을 위해 일할 차례’란 보험사 광고 문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출해 주겠단 대부 광고에 견주면 훨씬 세련돼 보인다. 그런데 현실은 좀 지저분하다. 날 위해 나와야 할 보험금은 보험약관의 ‘일부 문구’에 걸려 온전히 안 나오는 경우가 왕왕 있고, 끝까지 받아내려면 보험사와의 장기 소송도 각오해야 한다. 요즘 세상에도 이런 황당한 일이 있느냐고 물을 수 있는데, 최근 문제가 된 즉시연금 사태가 딱 이 경우다.

지난 7월말 20대 국회 후반기 첫 정무위원회 회의에서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은 한국당 의원들에게 혼쭐이 났다. 금감원의 즉시연금 일괄구제 방침 때문이다. 윤 원장을 향해 쏟아진 한국당 의원들의 호통을 옮기면 이렇다. “금감원장은 즉시연금 소송 문제에 절대 개입하지 마라. 금감원의 시장 개입이 도를 넘어섰다.”(김선동 의원), “법적 근거도 없이 금감원이 일괄 구제를 추진하는 건 직권남용 우려가 있다. 전 정부에서도 여기에 걸린 사람이 여럿이다.”(김종석 의원), “보험사가 줄 의무가 없는데 (보험금을) 주라는 건 결국 (보험사 돈) 빼앗아 주는 것이다.”(김진태 의원) 이들 지적이 정말 타당한 걸까.

이번 사태는 보험사가 약관대로 즉시연금 보험금을 지급했는지 여부가 쟁점이다. 금감원은 약관대로 주지 않았다는 것이고, 보험사들은 줬다고 주장한다. 즉시연금은 일반 상품과는 조금 다르다. 이 상품은 처음에 1억원을 내면 약정기간 동안 매달 연금을 지급하고 만기 때 1억원을 온전히 돌려주는 상품이다. 일반 상품은 보험사가 초기 사업비(설계사 수당 등)만 한 번 떼는데, 즉시연금은 만기 때 처음 낸 보험료를 다 돌려줘야 하기 때문에 초기 사업비 외 운용수익에서 만기보험금으로 충당할 준비금을 추가로 뗀다. 상품구조를 단순화하면 사업비를 두 번 떼는 셈이다.

그런데 약관엔 이 부분이 명확하지 않다. 예컨대 “우리는 만기보험금을 온전히 돌려주기 위해 운용수익에서 필요한 재원을 추가로 뗍니다.”라고 분명히 적어놨다면 문제될 게 없는데, 실제 약관(한화생명)엔 “만기보험금을 고려해 연금을 지급한다”고만 나와 있다. ‘고려하다’는 헤아려 본다는 뜻으로 ‘뗀다’는 의미의 ‘공제’와는 뜻이 완전히 다르다. 한화생명은 만기보험금 준비금을 추가로 뗀다는 내용의 ‘산출방법서’를 따른다는 부분이 약관에 명시돼 있다고도 주장한다. 하지만 산출방법서는 보험사가 준비금을 매길 때 적용하는 계산식을 정리한 문서로 정작 고객에겐 제공되지 않는다. 설령 아주 꼼꼼한 고객이 이를 요구했어도 보험상품을 만드는 계리사가 아닌 이상 수학 기호로 빼곡한 이 산식을 보고, “아 만기보험금 준비금을 추가로 떼는구나”라고 유추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보험사들은 소비자들이 약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생긴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로 상법엔 약관의 뜻이 명확하지 않을 때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돼야 한다고 돼 있다. 약관을 암호문처럼 만들지 말라는 취지다.

산출방법서에 나와 있는 계산식

이번 사태에 연루된 소비자는 16만명, 보험사의 미지급금 규모는 대략 1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국내 보험사들이 대부분 약관을 그대로 베껴 상품을 파는 걸 감안하면 16만명 모두 같은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된다. 금감원이 일괄구제를 추진하는 배경인데, 한국당은 이를 두고 월권이라고 지적했다. 한국당은 금감원에 검사도 나가지 말라고 엄포를 놨다. 시장에 관이 개입하지 말라는 건데, 이 덕분에 16만명은 보험사를 상대로 개별 소송을 걸어야만 덜 받은 연금을 챙길 수 있다. 소송 마무리까지 3년쯤 걸릴 것이다. 소비자가 당장 돈 돌려받기란 물 건너 갔다는 얘기다.

이 참에 잘못된 관행이라도 바로잡는 건 어떨까. 윤 원장은 즉시연금 일괄구제 방침을 정한 이후 “왜 이렇게 강경하게 나가냐”며 여기저기서 타박성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들 명단을 금요일 금감원 국감 때 공개하면 어떨까. 이야말로 월권 아닌가.

김동욱 경제부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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