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유소 화재 유발에 중실화죄 적용... 관리부실 직원은 1명도 입건 안해

9일 경기 고양경찰서에서 장종익 형사과장(왼쪽)이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과 관련된 풍등과 동일한 제품을 공개하며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인근에서 날아온 풍등을 다시 날려 저유소 화재 원인을 제공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경찰이 중실화죄(중대한 과실로 불을 내 물건을 태운 죄)를 적용한 것을 둘러싸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관리 부실 책임을 가리기 위해 상대적 약자인 외국인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10일 경찰 등에 따르면 경기 고양경찰서는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 피의자인 스리랑카인 A씨에 대해 중실화 혐의(형법 제171조)를 계속 적용하기로 했다. 다만 8일 오후 긴급체포했던 A씨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하지는 않기로 했다. 경찰은 긴급체포 시한(48시간)이 지난 이날 오후 A씨를 석방했다. 앞서 경찰은 중실화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검찰이 두 차례나 반려했다.

A씨는 7일 대한송유관공사 저유소로부터 1㎞ 떨어진 터널 공사장에서 풍등을 날려 저유소 화재를 유발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A씨가 날린 풍등이 저유시설 잔디밭에 떨어져 불이 붙었고, 이로 인해 기름 탱크가 폭발해 화재가 났다며 A씨에게 중실화죄를 적용했다.

법조계에서는 일반 실화죄보다 처벌이 강한 중실화죄를 적용한 것에 대해 평가가 엇갈린다. 일반 실화죄는 징역 또는 금고형이 없고 1,500만원 이하의 벌금형만 받는 데 비해, 중실화죄가 적용되면 3년 이하의 금고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 가능하다.

대법원 판례를 보면 법원은 중실화죄 성립 요건인 ‘중대한 과실’을 매우 엄격하게 해석한다. 연탄아궁이에서 80㎝ 떨어진 곳에 쌓아둔 스폰지와 솜이 아궁이로 넘어지면서 화재가 발생한 사건에서 대법원은 중실화죄를 묻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불 붙은 성냥개비를 휴지가 담긴 재떨이에 버려 불이 난 사건에서도 대법원은 중실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전례를 감안하면 이 사건 역시 A씨가 풍등을 날려 저유시설에 불이 붙을 것을 예상했거나, 풍등이 잔디밭에 떨어져 불이 날 것을 예견했어야만 중실화죄가 성립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줄곧 “풍등이 날아가자 이를 쫓다 잔디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잔디에 불이 붙은 것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A씨 변호를 맡은 최정규 변호사는 “A씨는 잡일을 도맡았던 미숙련 노동자이고 근처에 저유시설이 있는 것도 몰랐다”고 주장했다. A씨가 정말 저유소의 존재를 몰랐다면, 대형 화재 발생을 예견하기 어려웠다는 변호인 측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최정학 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 역시 “중실화죄를 적용하려면 자신의 행위로 인한 결과의 예견가능성이 일반 실화보다 훨씬 높아야 하고 과실도 상당히 무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여론이 집중된 사건의 피의자인 외국인 A씨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경찰이 중실화죄를 적용한 것으로 의심하기도 한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피해 규모가 큰 데다 여론까지 들끓으니 외국인인 A씨에게 도주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구속이 가능한) 중실화죄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특히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의혹을 받는 관계기관 직원을 한 명도 입건하지 않고, 외국인인 A씨만 엄격하게 처리하려 한 것은 지나치다는 여론이 커지는 분위기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이종구 기자 minj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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