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현경 베를린자유대 연구원
연애변천사 강연 정리한 책 출간
김신현경 연구원은 최근 흥미롭게 본 드라마로 ‘이번 생은 처음이라’를 꼽았다. “연령, 경제 격차가 큰 세 커플이 그 격차와 상관없이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정신승리’로 끝난다. 낭만적 결혼에 대한 환상은 깨졌지만, 사랑을 통해 ‘평등한 우애’는 나눌 수 있을 거라는 요즘 세대의 바람을 투영한 셈”이라고 말했다. 김혜윤 인턴기자

도처에 깔린 리벤지 포르노, 일상으로 벌어지는 데이트 폭력, 납득하기 어려운 성폭력 판결…. 관계의 끝이 혐오가 된 시대에 사랑이 가능할까. 이런 문제를 10여 년 전부터 고민해 온 사람이 있다. 국내 2세대 여성학자로 꼽히는 김신현경 독일 베를린자유대학 박사후 전임연구원이다. 2003년 이화여대 여성학과에서 ‘연애경험’에 대해 석사논문을 쓴 그는 2014년 ‘연예산업’에 관한 박사논문을 썼다. 이 경험과 문제의식을 토대로 지난해 초 영화, 드라마, 아이돌 문화를 통해 한국의 연애변천사를 짚는 연속 강연을 진행했고, 지난 달 초 이 강연을 정리한 동명의 책을 출간했다. 최근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김신 연구원은 “1,2년 사이 젠더 관련 이슈와 인식이 급변했다. 강연을 진행할 때만 해도 수강생 50명 중 남자는 딱 1명이었는데, 책 출간 직후 열린 행사에 온 70명 중 10명 이상이 남자였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은 사회에서 남녀는 어떻게 자유롭고 평등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한국 첫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이혼고백장’(1934) 문제의식을 관통하는 말이다. 김신 연구원은 “신분제 사회가 무너지며 ‘인간은 평등하다’고 사람들이 말은 했지만 사실 평등하지 않은 조건이 유지됐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남녀관계를 결정짓는 두 가지 힘으로 가족주의, 군사주의를 꼽을 수 있죠. 사람을 개인이 아니라 역할로 보기 때문에 연애, 결혼에서 ‘남편 역할, 아내 역할’이란 규범이 작동합니다.” 가부장제가 남녀 역할을 구분 지었던 시대, 성별로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평등한 ‘자유연애’를 주장한 나혜석은 “이 문제(성역할)를 자각하고 저항한 한반도 최초의 여성”이라는 주장이다.

대중문화를 통해 본 한국사회는 이후 80여 년간 조금씩 바뀌었지만, 큰 틀에서는 나혜석의 인식수준을 달성하지 못했다. 김신 연구원은 “한국 사회가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여성과 남성이 어릴 때부터 길러지는 성사회화 과정이 다르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변화의 속도도 다르다”면서 “여성은 아주 빠르게 변화를 받아들이고 변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여성도 늘고 있는 반면 남성은 머뭇거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신현경 베를린자유대 연구원. 김혜윤 인턴기자

‘건강한 연애의 가능성’은 15년 전 김신 연구원의 석사논문 주제였다. 1994년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후 ‘여학생이 전체 신입생의 30%를 넘었다’는 전공 교수의 ‘걱정’을 들은 후 여성학 공부로 방향을 바꿨다. 90년대 학번을 ‘대중문화 키드의 세대’라고 정의한 그는 “영화, 드라마의 판타지가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모순되고 굴절된 시대의 욕망이 반영되기도 좌절되기도 한다. 제 연구는 그 과정을 섬세한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드라마 ‘응답하라’시리즈는 90년대 사회상과 성역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드라마 세 편은 모두 여주인공이 가족 같은 이웃과 결혼하는, “원래 가족이었던 사람이 더 큰 가족이 되는 방식으로” 끝난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 남은 ‘남는 건 가족밖에 없다’는 불안한 욕망, 어린 시절부터 알아왔기 때문에 ‘안전하게 만나’ 사랑할 수 있는 판타지가 투영돼있다.

김신 연구원은 법과 제도에 더해 성차별적인 관행·관습, 감성까지 문제로 삼는 3세대 페미니즘 운동과 작금의 남성·여성 혐오의 시작을 2010년 무렵이라고 봤다. “멀게는 1999년 군가산점폐지 때부터 온라인상에서 (일부 남성이) 여성혐오를 놀이문화화하기 시작했고, 오프라인에서의 공적 메시지(성별 평등하다)와 별개로 온라인에서 다른 문화가 펼쳐졌죠. 법, 제도, 관습의 성차별에 대한 구체적인 페미니즘 언어가 포착되고, 혐오 발언 ‘김치녀’ ‘한남’ 등이 극화된 형태로 터져 나온 게 2010년대이죠. 온라인상의 혐오 발화, 명명, 몰카(몰래카메라) 등이 페미니즘 주요 의제로 떠오르는 배경이라고 봅니다. 여성의 문제의식이 나온 전개된 과정을 보면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이 보일 텐데, 한국사회는 과정을 보지 않죠.”

87년 민주화와 함께 여성의 사회활동이 늘고, 경제력이 성장하면서 “사랑과 연애, 결혼 같은 가장 사적인 지점”에서도 ‘평등한 개인의 관계’를 요구하는 여성들이 등장했다. 동시에 “계급을 막론하고 총체적으로 남성이 여성 우위에 있던” 힘의 구도가 깨졌다. “최근에는 극소수의 남성과 더 극소수의 여성이 중심에, 대다수의 남녀가 주변으로 배제되는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죠. (일부) 남성은 이 분노를 여성에게 투사한다고 봅니다. 지금 세대 남성은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기도 하고, 좋아하는 여성상이 예전과 바뀌기도 하는데, 친밀성(연애관계)에서 남성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강하죠. 예전과 다른 남자라는 걸 보여주려는 욕구와 그래도 여성을 통제하면서 자기 권능감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함께 있는데 이 균형을 잡을 수 없을 때 손쉽게 혐오발언이나 폭력을 행사합니다.”

김신현경 베를린자유대 연구원. 김혜윤 인턴기자

이런 시대에 사랑이 가능할까. 김신 연구원은 가장 이상적인 연애 커플로 드라마 ‘밀회’ 속 오혜원과 이선재를 꼽았다. 선생이 여성이고 제자가 남성인 커플은 전형적 이성애를 탈피하는 관계다. 이보다 주목할 점은 오혜원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선재의 태도다. 김신 연구원은 “극중 이선재는 오혜원이 가난한 자기 집을 찾아오자 방을 정성스레 걸레질 하고 선생님을 맞는다. 한국 드라마에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물다. 선재의 재생산노동은 단지 집안일을 나누는 것뿐 아니라 오혜원이 자신을 성찰적으로 깨닫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저는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한다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진정한 인간관계만이 겨우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말했다.

“작금의 시대에 연애가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가능하지만 아주 어렵다고도 봅니다. 여성학 공부와 성찰은 ‘그 사람과 나는 한국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조형된 욕망을 투영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연애를 했고, 관계가 그렇게 되었다’라고 깨닫는 과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저는 그 성찰이 더 나은 사랑의 과정,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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