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린 워즈니아키가 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차이나오픈에서 우승한 뒤 대회 요원들과 경기에 도움을 준 볼퍼슨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뉴스

테니스 경기를 보다 보면 선수가 아닌 코트를 바삐 뛰어다니는 어린 친구들에게 시선이 머물곤 한다. 선수들의 플레이가 중단된 잠깐의 빈 시간, 코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이들이다. 네트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잔뜩 웅크리고 있던 소년, 소녀들은 공이 떨어지면 쏜살같이 달려나가 주워온다. 또 베이스라인 뒤쪽 벽에 벽화인양 미동도 없이 딱 붙어있던 친구들은 랠리가 중단되면 바로 툭 튀어나와 선수가 필요한 볼이나 수건을 전해준다. 6명이 한 조가 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들 볼보이ㆍ볼걸(이들을 아울러 ‘볼퍼슨’이라 일컫는다) 덕에 코트 위의 공들은 빈틈 없이 관리된다.

볼퍼슨은 대체로 테니스 꿈나무인 주니어 선수들이 맡는다. 유명 선수들의 경기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라 많은 주니어 선수들이 볼퍼슨 경험을 희망한다. 테니스 규정을 숙지하는 것은 기본이고 선수마다의 특별한 습성까지 기억해야 한다. 뙤약볕 아래서 뛰어다녀야 하기에 강한 체력은 필수다.

볼퍼슨의 실수 장면이나 선수들과 어우러진 재미난 에피소드는 유튜브에서도 인기가 높다. 2014년 프랑스오픈에서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가 쉬는 시간 볼퍼슨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함께 음료를 마시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선수들이 마냥 다정한 건 아니다. 때론 선수들의 화풀이에 애먼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지난달 말 중국에서 열린 선전오픈에서 페르난도 베르다스코(스페인)는 어린 볼퍼슨에게 함부로 했다가 전세계 테니스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베르다스코가 대회 4강전을 치르는 도중 수건을 재빨리 가져오지 않았다고 볼퍼슨에게 고함을 질러댄 것이다.

볼퍼슨이 봉변을 당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아드리안 마나리노(프랑스)는 2017년 윔블던 대회에서 볼퍼슨의 어깨를 고의적으로 강하게 밀쳐 9,000파운드(약 1,330만원)의 벌금을 받았다. 볼퍼슨에 우산을 씌워주었던 조코비치조차 2015년 윔블던 준결승전에선 수건을 달라고 소리쳤다가 바로 사과한 적이 있다. 라파엘 나달(스페인)은 지난해 윔블던 대회에서 볼퍼슨에게 간식 봉지를 버려달라고 건넸다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볼퍼슨은 열정 하나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나섰지만 시속 200㎞가 넘는 공 앞에 무방비로 서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감정 학대까지 견뎌내야 한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수개월의 엄격한 훈련을 거친 그들이지만 정작 코트에선 선수의 몸종이 된 양 수건을 대령하고, 우산을 펴 그늘을 만들어줘야 한다.

테니스는 오랫동안 귀족스포츠로 대접 받아왔다. 선수가 아닌 관중에게까지 엄격한 매너와 에티켓이 요구되는 스포츠다. 빠른 경기 진행과 선수들의 집중력 유지를 위해서라지만 나어린 볼퍼슨에게 극진한 선수 수발을 강요하는 게 옳은 일인가 싶다.

지난 선전오픈 베르다스코의 악행이 알려진 직후 영국의 테니스 코치 주디 머리는 ‘볼퍼슨은 볼에만 집중하고 수건은 선수들이 직접 챙기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트위터에 올렸고 이에 많은 테니스팬들이 공감을 표시했다.

세계남자프로테니스(ATP) 협회도 ‘수건 수발’의 개선을 모색하고 나섰다. 일단 11월에 열리는 21세 이하 넥스트제네레이션 ATP파이널에선 코트 뒤에 수건 걸이를 설치해 선수들이 직접 수건을 챙기도록 하겠다는 것. 운영 성과를 보고 점차 더 큰 대회에도 적용한다는 계획이다. 시대에 맞지 않는 규칙은 고치는 것이 맞다. 수건은 선수가 직접 챙기면 되고, 쉴 그늘이 필요할 땐 볼퍼슨이 들고 선 우산 대신 고정 파라솔을 설치하면 될 일 아닌가. 그게 140년 넘는 윔블던의 전통이든 아니든 간에.

관습이란 이유로, 효율의 이름으로 어리고 약한 이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게 테니스의 수건 시중만은 아닐 것이다. 나 또한 ‘수건’ 때문에 누군가에게 함부로 소리치지 않았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이성원 스포츠부장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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