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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유소 잔디 18분이나 불타는 동안, 송유관공사 까맣게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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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유소 잔디 18분이나 불타는 동안, 송유관공사 까맣게 몰랐다

입력
2018.10.09 17:45
수정
2018.10.10 02:04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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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송유관공사 저유소 화재 =그래픽 김문중 기자
고양시 송유관공사 저유소 화재 =그래픽 김문중 기자

스리랑카인이 날린 풍등 한 개가 저유소 인근 잔디에 내려 앉은 뒤 대형 화재로 번지는 동안 이를 관리해야 할 직원들은 무려 18분 동안 화재 발생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저유소 외부에 단 한 개의 화재 감지센서도 달려 있지 않았던 사실도 경찰조사 결과 확인됐다.

강신걸 고양경찰서장은 9일 대한송유관공사 고양저유소 화재 피의자 검거 브리핑을 갖고 “스리랑카인 피의자 A씨가 7일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중 쉬는 시간에 산 위로 올라가 풍등을 날렸다”며 “풍등이 저유소 방향으로 날아가자 이를 쫓아가다 저유소 잔디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되돌아왔다”고 말했다. 경찰은 브리핑에서 풍등이 휘발유 탱크 바로 옆 잔디밭에 추락하는 장면과 폭발이 일어나는 장면 등이 녹화된 폐쇄회로(CC)TV 영상을 공개했다.

CCTV를 보면 A(27)씨는 이날 오전 10시32분쯤 현장에 떨어져 있던 풍등 하나를 날렸고 풍등이 바람을 타고 저유소 쪽으로 날아가자 황급히 쫓아가다 멈춰서 떨어진 지점을 바라봤다. 이어 풍등이 떨어진 저유소 잔디에 불이 붙어 연기가 났고, 잔디가 점점 타들어가더니 잠시 뒤 저유소 탱크가 폭발하면서 지붕이 날아가고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경찰은 A씨가 날린 풍등은 공사현장에서 불과 300m를 날아간 뒤 2분 뒤 추락했으며, 저유소 탱크 바깥 잔디에서 오전 10시36분쯤 연기가 나기 시작한 것으로 확인했다. 이 불은 18분 뒤인 10시54분쯤 휘발유탱크(직경 28.4m, 높이 8.5m)의 9개 유증기 환기구 중 1곳을 통해 내부로 옮겨 붙어 폭발사고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풍등은 지름 40cm, 높이 60cm 크기의 한지 재질로 저유소에서 800m쯤 떨어진 한 초등학교에서 전날 오후 8시 진행된 ‘아버지 캠프’ 행사에서 날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때까지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는 화재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이는 휘발유 탱크 외부에 화재 감지센서가 없었거나 있더라도 감지범위 등 이유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 송유관공사 측은 “지붕(콘 플로팅 루프탱크)에 화재감지장치가 있었지만 거리가 멀어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것 같다”고 해명했다.

경찰은 이날 피의자 A씨가 저유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점 등을 들어 중실화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검찰은 수사 보완을 요구하며 일단 반려했다. 경찰은 풍등과 저유소 화재의 인과관계를 정밀 확인하기 위해 재차 합동감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또 18분 동안 잔디밭 화재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점 등을 들어 시설 관리자를 대상으로 위험물 안전관리 위반 여부를 확인할 방침이다.

이번 화재로 기름 266만ℓ가 불에 타 43억원의 재산피해가 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찰은 “A씨는 지난 2015년 5월 스리랑카에서 비전문취업비자(E-9)로 입국한 외국인 근로자로 2020년 출국예정”이라면서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는 자제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화재를 풍등을 잘못 날린 A씨의 전적인 책임으로 돌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다. 이번 사고가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 거듭된 결과라는 경찰의 조사발표와는 별도로 관리를 맡고 있는 대한송유관공사측이 보다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한 선제적이고 충분한 대비책을 마련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방재시스템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날 경찰은 유증기 환기구에 설치된 ‘인화방지망’으로 불티가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이 시설은 불씨가 유입되면 곧바로 꺼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일각에서는 인화방지망이 성능이 떨어지거나 부실 설치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유류 저장탱크에 46대의 CCTV가 있음에도 화재와 폭발을 인지하지 못한 것도 정상적인 근무 시스템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고양저유소처럼 저유탱크들이 한 곳에 밀집한 구조도 따져봐야 할 대목이다. 대한송유관공사측은 “유류 탱크가 20~25m 가량 인접해있지만 각 탱크가 60㎝ 두께의 콘크리트 방화벽이 있어 섭씨 300도까지는 화재에 대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단 화재가 발생하면 300도를 넘게 올라가는 일은 쉽게 일어날 수 있고, 기상이 좋지 않아 헬기 등을 이용한 진화작업이 늦어질 경우 자칫 인근 탱크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천대 백동현 교수와 최돈묵(이상 설비소방공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주요 시설에는 외부요인에 의한 화재발생 확률이 낮다는 이유로 외곽 경보시설 설치가 충분히 돼 있지 않다”면서 “고양 화재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CCTV나 화재감지기를 충분히 설치해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기회에 저유소 전반에 대한 안전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저유소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반시설이지만 송유관공사가 관리하는 전국 저유소 8곳 가운데 저장용량이 가장 큰 판교 저유소(약 3억1,300만ℓ)를 제외한 나머지 저유소 7곳은 저장 유량이 기준(1억5,000만ℓ)에 미치지 못해 국가중요시설로 분류되지 않고 있다. 정부 지침에 따라 매년 두 차례 점검을 받고, 민관군 합동훈련인 을지연습 때 화재 대비 훈련 대상에도 포함되는 판교 저유소를 빼면 나머지 저유소의 안전관리는 민간이 맡고 있는 셈이다.

이들 7개 저유소는 안전점검 규정도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부 전문가가 저유소 유류탱크를 개방해 실시하는 정밀진단은 11년에 한 번씩 하도록 돼 있고, 안전점검은 송유관공사 측이 매년 1회 자체 검사를 해 관할 소방서에 보고하면 된다. 실제 고양 저유소는 2014년 이후 외부 정밀진단을 받지 않았다.

이용재 경민대학교 소방안전관리학과 교수는 “화재가 나면 센서가 작동해 탱크 내 자체 포소화설비로 화재를 순간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정상적인데 이번에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며 “재발 방지를 위해 저유소 시설에 대해 보다 체계적인 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대한송유관공사(대표 최준성)는 이날 저유소 폭발화재 사고와 관련,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재발 방지 종합대책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송유관공사측은 “외부 인사를 포함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안전기구’를 만들어 사업장의 안전 점검을 실시할 것”이라면서 “법적·사회적 요구 수준을 넘어선 최고 수준의 안전설비 능력을 갖추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범구 기자 ebk@hankookilbo.com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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