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 연구엔 공감능력이 중요
대안 없는 비판은 공허하고 비생산적
연구자는 항상 사회적 책임 인식해야

삶은 끊임없는 배움과 깨달음의 과정이다. 배움과 깨달음은 다양한 맥락에서 발생한다. 때로는 낯선 누군가와의 짧은 만남이 큰 가르침을 안겨 주기도 한다. 그 만남이 반드시 유쾌한 것일 필요는 없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배움과 깨달음이 저절로 오는 건 아니다. 모름지기 삶과 스스로에 대해 겸허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똑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좀 더 많은 걸 배우고 깨닫게 된다.

이제껏 나를 키우고 벼렸던 숱한 경험의 점들이 연결되어 지금의 내 삶이 있게 했다. 특히 학창시절에 배태된 해묵은 부채 의식은 내가 대학에 자리를 잡은 이래 줄곧 사회적 약자 문제를 고민하게 했다. 살면서 가난한 수재들을 여럿 만났다. 중학교 시절 한 친구는 서로 경쟁해야 한다는 게 두려울 정도로 뛰어났다. 그런 친구가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해야 했다. 어디 그 친구뿐이었겠는가. 나이가 들고 내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갈수록 뭔가 단단히 빚을 졌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부채 의식에 짓눌려 있던 내가 계층 간 교육격차 문제를 본격적으로 천착한 건 2000년대 중반부터였다. 한 국책연구기관이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학교에서 노동시장으로의 이행을 살펴보기 위한 패널조사에 착수했을 때다. 해당 조사의 설문지 개발을 주도했던 나는 수집된 자료를 맨 먼저 건네받았다. 이전에 공개된 적 없는 개별 학생의 수능 성적이 포함된 자료를 손에 쥔 게 믿기지 않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분석에 매달렸다.

예비적 수준의 분석 결과만 발표했는데도 세간의 관심은 뜨거웠다. 한 신문은 교육격차 실태를 1면 톱기사로 다뤘고, 24시간 뉴스 채널은 부모 학력 간 수능 점수 차이를 부각한 그래픽을 종일 내보냈다. 연구의 본질은 온데간데없고 너무 선정적으로 현상만 부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불현듯 밀려왔다. 독자나 시청자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선 불가피할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연구자 입장에서 적잖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구 관련 보도가 나간 날 오후 2시쯤 연구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 상대방은 취기가 거나한 목소리로 내가 연구를 수행한 장본인인지 물었다. 그러곤 자신이 지방의 한 대도시에 거주하는 학부모임을 밝히며 거친 언사로 항의 겸 하소연을 쏟아냈다. 자신은 중학교만 마쳤지만 자녀에겐 좀 더 나은 삶을 물려주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TV 보도를 통해 대졸자 자녀에 비해 중졸 부모를 둔 학생의 수능 점수가 50점 이상 낮다는 사실을 접하곤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했다며 울분을 토했다.

해명이나 설득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학부모의 울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하릴없이 듣고만 있다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뭐가 잘못되었는지 골똘히 생각해 봤다. 이런 성격의 연구가 사안의 심각성만 부각하는 선에서 끝날 경우 누군가에게 낙인을 지우고 삶의 의욕을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는 사실을 간과한 게 문제였다. 학부모가 그토록 격하게 울분을 터뜨리지 않았던들 나로선 결코 깨닫지 못했을 문제였다.

학부모의 전화는 나를 밑바닥부터 흔들어 깨웠다. 그간 영혼 없는 연구자로서 개인적 호기심이나 해소하고자 했던 건 아닌지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상처 많은 영혼을 다독이고 배려하는 데는 값싼 동정이나 연민보다는 진정 어린 공감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사회적 약자 문제를 다룰 때 대안 제시가 없는 현실 비판이 얼마나 공허하고 부질없는지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은 어떤 연구를 수행하든 사회적 책임감을 바탕으로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아 연구를 마무리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사회적 약자 문제를 고민하는 사회과학도가 견지해야 할 소명감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뜬 것도 그 언저리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여겼던 한 통의 전화였다. 사실은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가르침을 준 전화였던 셈이다.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인기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