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과 북한 수뇌부 책임까지 걸린 문제
우리도 이젠 한반도 전쟁 공포서 벗어나야
“베트남전 원인은 불신” 맥나마라 말 새겨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7일 평양에서 열린 면담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피할 길이 없었는가. 그리고 전쟁을 더 빨리 끝낼 수는 없었는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국방장관인 로버트 맥나마라는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30여년이 지난 1997년 당시의 베트남 지휘부에 대화를 제의했다. 그래서 그해 6월 열린 게 역사적인 ‘하노이 대화’다.

양측 최고 책임자들이 사흘 동안 얼굴을 붉혀가며 토론을 벌인 끝에 내린 결론은 중요한 교훈으로 남았다. 서로의 오해와 신뢰 부족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고, 장기화한 원인이라는 사실이다. 베트남이 공산화하면 국경을 맞댄 중국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해 전쟁을 시작했다는 미국 주장에 베트남은 중국 침략에 끊임없이 대항해온 베트남 역사에 대한 무지라고 맞받아쳤다.

전쟁 초기의 비밀 평화협상을 좌초시킨 미국의 공습에 대해서도 베트남은 “종전이 아닌 목을 졸라 죽이려는 속셈으로 판단했다”고 털어놓았고, 미국은 “전쟁을 하루라도 일찍 끝내고 싶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처절한 전쟁 발발 과정과 상대의 의도를 뒤늦게 안 미국과 베트남의 당사자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수십 년 북미 관계가 해결되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도 신뢰의 결여다. 1993년의 ‘제네바합의’와 2005년의 ‘9ㆍ19 공동성명’이 휴지 조각이 된 것은 디테일에서 오해와 불신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 포기 의사가 없다고 끊임없이 의심했고, 북한도 미국이 약속과 달리 뒤통수를 치고 있다고 여겼다.

지난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합의문에 첫 번째로 신뢰 구축을 명기한 것은 과거의 실패한 접근법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서약이다. 하지만 전례 없는 정상 간의 ‘톱다운’ 방식에도 실무협상에서는 불신이 여전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의 불신이 커 보이지만 실상은 북한이 더 크다. 중요한 거래에서 강자가 변심할 경우 더 큰 피해는 약자에게 돌아간다. 미국은 북한과 협상이 깨져도 별로 손해 볼 게 없지만 핵 무기가 유일한 재산인 북한으로서는 잘못 내줬다가는 쪽박밖에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북한이 종전선언에 목을 매는 것은 국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종전선언은 평화체제와 달리 구속력이 없다고 볼 수 있지만 어쨌든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전 세계에 알리는 행위임에는 분명하다. 핵 포기를 놓고 군부 일각에서의 부정적 태도가 말끔히 정리되지 않았다는 전언에 따른다면 북한 지도부가 내부적으로 비핵화 명분을 얻으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이제 종전선언은 김정은 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정권 수뇌부의 책임 문제까지 제기될 수 있을 정도로 비중이 높아졌다.

’북한의 수석대변인’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선언에 매달리는 것도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 우리가 걱정하는 북한의 재래식 군사 위협과 핵 위협은 실존하는 공포다. 지난 65년간 북한의 숱한 도발과 충돌사태가 이를 보여준다. 미국이 갖는 제한적 위기의식과 손바닥만 한 한반도에서의 상시적인 전쟁의 두려움이 같을 수는 없다.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4차 방북에서 비핵화와 종전선언 등의 주고받기에 의견 접근을 이뤘다는 분석이 나온다. 종전선언은 북미관계가 본격적인 신뢰의 단계로 돌입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고무적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북한이 종전을 논의하고 있다. 축복한다”고 했다. 그러다 종전선언에 대한 북한의 간절함을 알고 물건값을 한껏 올렸다. “종전선언이 유엔사와 주한미군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김 위원장의 확약에도 좀처럼 거래를 트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단순한 ‘정치적 선언’에 불과할 수 있는 종전선언을 묵히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는 것은 거래 원칙에도 어긋난다.

“전쟁을 막으려면 먼저 적을 이해하고, 그다음에는 비록 상대가 적일지라도 최고지도자끼리의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 ’하노이 대화’를 마친 뒤 맥나마라가 한 말이다.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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