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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악의는 천국을 약속하나

입력
2018.10.08 18:18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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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이행 논쟁으로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 폴 스위지와 함께 ‘먼슬리 리뷰’를 창간했던 전후 미국의 대표적 노동 운동가이자 이론가인 리오 휴버먼(1903~1968). 그는 이행 논쟁과 관련해 흥미로운 질문 하나를 던진 적이 있다. 왜 영국 귀족은 지세를 올리지 않았느냐는. 초기 자본주의는 농업 잉여가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 데서 시작했다. 그렇다면 농업 잉여가 생겼을 때 대규모 농지를 보유한 귀족들이 지세를 올려서 이를 걷어가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리하지 않았다.

▦ 최근 퇴계 이황이 300여명의 노비를 소유한 땅부자였다는 기사가 돌아다녔다. 오래된 연구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명성이 자자한 유학자라면 다들 대자연 속에서 학문에 심취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으며 도를 함양한 다음, 뒤돌아 앉아 역시 소출과 노비를 늘리는 방안을 고심했다. 지주였으니까. 나쁜 양반지주를 일컬어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었다는 표현이 왜 나왔겠는가. 지방의 양반이라도 중앙정부에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였다면,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 영국 귀족은 조선 양반 지주보다 왜 상대적으로 너그러웠을까. 영국 귀족이 북유럽 해적 핏줄이라 잇속 계산에 능하지 못해서? 정치적 장악력이 약해서? 휴버먼도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다 자본주의 탄생의 비밀 어쩌고 눙치면서 지나간다. ‘일반적 시장 논리’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여서다. 서서히 식민지가 생기면서 해외의 부가 유입되자 굳이 국내의 지세 수입에 의존하지 않아도 됐던 게 아닐까 추정하는 정도다. 바꿔 말해 국내 토지에 묶인 채 열심히 재산을 불려야 했던 조선의 양반 지주들에겐 그 ‘일반적 시장 논리’가 더 확실하게 관철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조선은 망했다.

▦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현 정부의 경제 정책 전반에 대해 비판하는 글에서 빠지지 않는 문구 중 하나다. ‘일반적 시장 논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자주 쓰는 문구이기도 하다. 신중치 못한 선의는 지옥을 불러오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봤듯이 정교한 악의 또한 지옥을 낳는다. 질문은 여기서 생겨난다. 그렇다면 선의를 그토록 조롱하는, 현명한 당신들이 악의적으로라도 꿈꾸는 천국이란 어떤 것인가. 혹시, 자신들만의 천국인 건 아닌가.

조태성 문화부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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