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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조금 느리게, 함께 갔으면

입력
2018.10.04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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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기자가 살았던 도쿄에서 자주 이용했던 도에이 버스. 사진 도에이교통 홈페이지
지난해 기자가 살았던 도쿄에서 자주 이용했던 도에이 버스. 사진 도에이교통 홈페이지

‘저 기사분이 뭐라 하는 거지?’

지난해 봄, 1년 예정으로 도쿄 게이오대 연수를 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아이들과 시내버스에서 내리려고 문 앞에 섰다가 운전기사에게 큰 소리를 들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어를 잘 못해 기사의 빠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일본어를 배우고 난 후에야 그 말이 ‘버스가 정차하지도 않았는데 왜 걸어 나오느냐, 자리에 앉아라’ 하는 내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정류장 안내 방송이 나올 때마다 “버스가 설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가 함께 방송된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당시 딸아이가 다니던 도쿄한국학교 학부모들과 얘기해 보니 도쿄에 처음 간 서울 사람은 거의 다 한번씩 저지르는 실수라고들 했다.

서울 버스에서는 하차하기 전에 미리 문 앞에 가 있어야 한다. 스마트폰 등에 정신을 빼앗겨 깜박하고 하차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버스가 정류장에 선 다음에야 부랴부랴 내리려고 하면 다른 승객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도쿄에선 정반대다. 사람이 많아서 서 있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안전하게 정차한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서울 버스에서도 “노약자는 버스가 정차한 후 천천히 내리라”는 방송이 나오지만 대부분 승객은 미리미리 문가에 가서 서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도시에서는 속도가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70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초고령사회 일본에서는 속도가 최고의 가치가 아니다. 빨리 가는 것보다는 노인이나 장애인 등 교통 약자도 낙상 사고 등을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가는 게 더 중요하다. 한번은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운전기사가 달려와 안전하게 버스에 오르고 자리에 고정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장애인도 미안한 표정 없이 편안하게 버스에 탔고, 이 때문에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승객들도 당연한 듯 아무런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동네 상가 골목에서도 빠른 사람은 빠른 사람대로, 느리고 약한 사람은 느린 사람대로 서로의 삶의 속도를 인정하며 맞춰 사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편의점에서도 최근 급속하게 늘어난 외국인 직원들이 언어나 업무에 서툴러 곤란해 하면 일본인 직원이 바로 와서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모습을 자주 봤다. 동네 작은 식당에서는 나이 들어 팔이 조금씩 떨리는 것이 눈에 띌 정도인데도 느린 걸음걸이로 음식을 나르는 할머니 직원과, 이를 개의치 않고 기다리는 손님을 만날 수 있었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가치인 곳에서는 서로의 속도를 인정하고 기다린다. 하지만 속도가 더 중요한 가치인 세상에서는 뒤처지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다. 일부는 이들을 업신여기고, 이들과의 공존을 거부하기도 한다.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를 개교하기 위해 부모들이 무릎을 꿇는 일까지 벌어진다.

심지어 약자 사이에서도 차별과 배제가 이뤄진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기다리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새치기하며, “요즘 왜 이렇게 장애인들이 많이 보이는지 모르겠어. 뭐가 잘났다고 뻔뻔히 활개치고 다녀!” 하고 외치는 할머니를 봤을 때 마음 속에서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때는 미처 얘기하지 못했지만 또 그런 분을 마주치면 반드시 이렇게 얘기하리라. “할머니, 예전에 장애인 분들이 몸에 쇠사슬 묶고 장애인 이동권 투쟁 하셔서 지하철 역마다 엘리베이터 설치된 거 아세요?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시는 분이 그러시면 안 되지요. 제발, 조금 느리게, 함께 가면 안 되나요?”

최진주기자 parisc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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