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메두사 엄마

'메두사 엄마'. 논장 제공

잘 익은 밀빛 머리털이 장마 뒤 폭포수처럼 풍성하다. 온몸을 뒤덮고 사방으로 뻗어 내려 땅바닥까지 굽이친다. 바닷가 검은 바위에 걸터앉은 머리 주인은 생김새를 짐작하기 어렵다. 그저 묵직한 머리다발을 끌어안고 배죽 고개를 내민 아이와 아이를 돌아보느라 살짝 비어져 나온 코끝 덕에 아이 엄마임을 짐작할 뿐이다.

키티 크라우더의 ‘메두사 엄마’는 흥미롭다. 하필 메두사가 엄마라니, 꿈틀거리는 뱀 머리카락에 누구든 눈을 마주치면 돌이 된다는 신화 속 괴물 아닌가. 아테나의 저주,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 잘린 목에서 솟아나온 날개 돋친 말 페가수스, 프로이트와 거세 공포, 아름다움이 지닌 파괴적 힘, 가부장제가 만든 괴물, 매혹과 공포…. 흠흠, 이것저것 어수선하게 떠올리며 책장을 넘긴다.

보름달이 뜬 밤, 산파들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바닷가 외딴 집에서 진통이 시작되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뱀처럼 꿈틀댄다. 메두사가 딸을 낳았다. 엄마의 머리털 속에서 이리제가 자란다. 머리카락이 안아 주고 음식을 떠 먹이고 걸음마를 가르치고 놀아준다. 메두사의 머리털은 포근한 요람이고 안락한 둥지이며 울타리다. 아이는 쑥쑥 자란다. 엄마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글자를 가르친다. 그러나 아이는 이제 울타리 너머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다. “나 학교에 가고 싶어요.”

메두사 엄마
키티 크라우더 지음∙김영미 옮김
논장 발행∙44쪽∙1만2,000원

이 책은 언뜻 세상에 상처 입어 방어기제가 발달한 과잉보호 엄마가 아이 덕분에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이야기로 읽힌다. 아이를 키우며 아이와 함께 성장한다는, 조금 익숙하나 늘 감동적인 이야기 말이다. 무성한 머리털로 거대한 보호막을 치고 외딴 집에 살며, 사람보다는 소라나 조개, 불가사리 따위와 더 친해 보이고, 아이를 울타리 안에만 두려던 주인공이 아이를 위해 세상과 통하는 문을 열고 스스로 머리털을 싹둑 잘랐다. 그럼 이제 저주가 풀리는 걸까.

그러나 메두사 엄마의 머리카락은 단순한 방어기제나 저주가 아니라 강력한 무기이자 유능한 도구다. 자신을 지키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힘이며 그녀를 그녀이게 하는 특별함이다. 그저 남과 달라 두려움을 자아낼 뿐이니 잘라버리면 끝이라고 눙쳐버릴 수는 없다. 또한 메두사와 이리제는 끝없이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성이라는 관습적 프레임이 아니라, 사랑하며 존중하는 바람직한 모녀관계를 보여준다. 메두사는 아이를 존중하고 아이와 대화할 줄 알며 아이의 선택을 받아들이면서 길을 찾으려 애쓰는 엄마다.

키티 크라우더는 메두사를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유능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그렸다. 산파가 필요하면 산파를 부르고 상냥하게 배웅도 한다. 제 힘으로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친다. 사교적이진 않지만 남들에게 아이를 자랑할 줄도 알고, 북적대는 사람들 틈바구니보다는 자연 속의 호젓한 삶을 사랑한다.

그녀가 남들과 똑같아지려고 너무 애쓰지 않길 바란다. 비록 “잘린 머리카락이 예쁜 바다뱀이 되어 따뜻한 해류를 타고 북쪽 바다를 찾아”갔다 해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다시 자랄 것이다. 남다른 능력과 욕구와 개성을 지닌 그녀가 세상과 아이와 자신의 삶 사이에서 제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머리카락은 자라고 빠지고 새로 돋는다. 새순이 돋고 자라고 시들고 새봄에 다시 돋아나듯이. 머리카락은 생명력과 신성한 힘과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학교에 온 엄마를 끌어안는 순간, 신생아 시절부터 내내 이리제의 머리를 꽁꽁 감싸고 있던 두건이 벗겨진다. 아직 비죽비죽한 더펄머리는 이내 쑥쑥 자랄 것이다. 엄마와 꼭 닮은 황금빛 머리카락은 이리제가 누구인지를 증명할 것이다.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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