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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자소설 시즌

입력
2018.10.02 18: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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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즌이 돌아왔다. 가을 신춘문예. 주관사는 대학과 기업. 응모 자격자는 만 17세부터 30세 안팎. 백일장의 시제는 꿈, 열정, 도전, 끈기, 극복, 창의, 협력, 봉사, 희생, 헌신, 배려, 감동과 유사어. 시는 안 되고 소설 장르만 응모 가능. 표시만 안 나면 대필 가능. 경쟁률은 수백 대 일. 사람보다 속도와 기능성이 뛰어난 AI(인공지능) 심사위원을 쓰는 게 더 효율적인 경연. 한 번만 당선되면 평생이 보장되는 등용문. 밤을 새워 쓰고 버리는, 이 시대 청춘들이 가장 절실하게 매달리는 고단하고 눈물겨운 청년문학 장르. 선택이 아닌 필수. 영상이 없는 ‘체험 삶의 현장’ ‘인간극장’ ‘휴먼다큐’ ‘영재발굴단’.

정답은? 아, 제목에 있구나. 요즘은 그것과 관련해 뭐가 뉴스일까 궁금했다. 네이버 검색창에 ‘자’자를 입력하자 첫 번째 연관검색어로 ‘잡코리아’가 떴다. 역시 입시 시즌, 취업 시즌이구나. ‘자소서’ 세 글자를 완성하니 ‘자소설닷컴’이 맨 윗자리를 차지했다. 아, 추석 연휴에 주요 포털사이트 실검 1위에 올랐다는 바로 그거구나. 처음으로 그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전략) 안 써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쓴 사람은 없다는 그 서비스! 자소설닷컴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 ‘서비스’ 업종이었군. 이렇게 깜찍하고 기발한 브랜드 네이밍을 할 줄 아는 사장님은 정말 소설가 자격이 있겠다. 그런데 국민이 다 아는 명사인 ‘자소설’은 유감스럽게 아직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이용자들이 참여하는 포털 오픈사전에만 올라 있다. 설명은 이렇다. ‘자신을 조금이나마 돋보이게 하기 위해 과장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자기소개서를 일컫는 말.’

자소서 산업은 블라인드 채용이 대세가 되면서 더욱 성업 중인 비즈니스다. 네이버 검색광고 영역을 살펴봤다. 164개 업체가 자소서 컨설팅, 첨삭, 대필 광고를 했다. 글자 수가, 페이지 수가 바로 지폐로 환산된다. 고시텔과 쪽방의 학생들이 여유가 있을까. 수저 색에 따라 자소서에서부터 자본과 인적자원의 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번엔 책 검색창에 들어가 자소서라고 쳐 봤다. 무려 779권. 이기는 자소서, 기적의 자소서, 발칙한 자소서···.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자. 자본주의 시대니까 너무 민감하지 말자. 정작 중요한 문제는 ‘나’ 그리고 ‘삶’이 아닌가.

(여기부터 다소 과장적 표현일 수도 있겠다) 이 시대 청춘은 자소서 항목 채우기 유효기간이다. 질풍노도는 자아성찰이 아닌 단지 글감의 소재다. 자소서는 내 삶의 지침서다. 학창생활은 자소서 설계도면에 따라 짜여야 한다. 나는 대학과 기업이 원하는 덕목을 갖추기 위한 삶의 연출자여야 한다. 내 삶의 경험들을 그들이 좋아하는 가치에 맞춰 어떻게든 재배치해야 한다. ‘살아온’ 내가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나여야 한다. 가능한 한 독특한 스토리텔링과 드라마틱한 콘텐츠가 포함돼야 한다. 없거나 부족하다면 창조하거나 부풀려야 한다. 단, 티가 나지 않게.

나는 십대 후반에 이미 인생 쓴 맛 단 맛 다 보고 내공이 가득 찬, 총체적으로 업그레이드된 레디메이드 울트라슈퍼히어로여야 한다. 면접관이, 로봇이 수 분 안에 아니 1초 만에 내 운명의 궤도를 결정하니까. 어떤 수험생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직 고등학생인데 그렇게 완벽한 꿈이 있어야 하나요. 차라리 그냥 공부를 하라고 하세요.”

참으로 가슴 저릿한 단어, 자소설을 생각한다. 자기 없는 자기소개서. 소개서가 아닌 생산공정표. 대책 없는 경쟁시대의 슬픈 자화상. 그들은 자기 아닌 자기를 보여 준 그 씁쓸함을 ‘소설’이라는 후렴으로나마 위안 삼는 걸까. 수고했다 자소서야. 모두들 이번이 마지막 자소설이길···.

한기봉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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