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유발 효과 높은 내수산업 키워야
기득권층 담합과 이념 경직성이 발목
시장의 힘 활용하는 규제 혁신 절실
경실련, 금융정의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최근 국회에서 은산(銀産)분리 규제 완화 중단을 요구하며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은산분리는 산업자본이 막강하던 36년 전 ‘삼성은행’ ‘현대은행’ 등을 막기 위해 만든 원칙이다. 정부는 핀테크 혁신 및 고용 창출을 위해 인터넷은행에 한해 ICT 기업의 대주주 참여를 허용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경실련 등은 “재벌 중심의 사회가 될 것”이라며 반발한다. 1980년대 운동권 논리의 반복이다. 촛불 국민은 재벌의 사금고화를 방치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연합뉴스

최근 ‘고용탄성치’라는 다소 난해한 경제지표가 공개됐다. 취업자 증가율을 실질 국내총생산(GDP)으로 나눈 값이다. 올해 1분기 한국의 고용탄성치는 일본의 8분의 1, 미국의 2분의 1 수준이었다. 경제가 성장할 때 일본의 일자리 창출 능력이 한국보다 8배, 미국은 2배가 높다는 뜻이다. 고용엔진이 식어가는 한국경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수치다.

고속 성장 중인 인도 베트남 등 개발도상국에 비해 고용 창출 능력이 떨어지는 건 이해가 간다. 산업구조가 고도화한 미국 일본보다도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 진단은 이렇다. ‘산업구조의 차이 때문이다. 미국 일본은 내수 시장이 크다. 돈을 풀면 경기 부양 효과가 곧장 고용 창출로 연결된다. 한국은 내수 규모가 작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다. 고용 유발 효과가 낮은 반도체 석유화학 등 장치산업이 주력이다. 아무리 반도체 수출이 늘어도 고용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고용을 늘릴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고용 유발 효과가 높은 내수ㆍ서비스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다. 둘째, 핀테크 자율주행차 등 신산업에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수 비중을 키우고 신산업을 육성하려면 관광 의료 교육 금융 등의 경쟁력 개선과 규제 혁신이 필수다. 문제는 기존 산업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의 담합이다. 참여정부는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규제 완화를 시도했으나 기득권층 저항에 발목이 잡혔다. 최근 10년 간 신산업으로의 구조 전환이 더딘 것도 마찬가지다. 원격의료는 의사들이, 차량공유 사업은 운송회사가, 은산(銀産)분리 규제 완화는 금융회사가 반대한다.

밥그릇 지키려는 기존 사업자들의 반발은 이해할 법도 하다. 더 심각한 건 흑백논리에 젖은 일부 시민단체의 이념 경직성이다. 이들에게 정의와 공정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다. 보건 의료 교육은 무조건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다. 공공성이 강한 금융 교통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민간자본의 진입과 경쟁을 허용하는 규제 완화에 결사 반대다. “진보주의자들은 반대할 줄만 안다. 말하자면 ‘정의롭지 못한 상황’이 있으면 이를 반대한다. 이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대안이나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은 없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을 뿐 아니라, 무엇을 추구하며 왜 추구하는지에 대한 합의도 없다. 결국 반대만 한다.”(아나톨 칼레츠키 ‘자본주의 4.0’)

규제 완화 대상이 대기업이라면 반대는 더 거세진다. 고용 창출 효과가 크지 않으니 대기업 성장을 포기하는 게 옳은가. 수출 제조업이 만들어내던 일자리가 한계에 봉착한 것은 사실이다. 대기업 수출과 투자가 늘어도 그 성장의 과실이 서민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낙수효과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예전만 못해도 제조업은 수백만 개의 안정적 일자리를 창출하는 중요한 산업이다. 조선ㆍ자동차 분야 구조조정이 고용 한파를 불러온 게 그 방증이다. 제조업에서 더 이상 일자리가 줄어들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념과 노선을 넘나드는 실용주의자였다. 국민 삶을 위한 정책이라면 진보 보수를 따지지 않았다. 핵심 지지층이 ‘좌회전 깜박이 켜고 우회전한다’고 비난하며 등을 돌린 배경이다. 지금은 참여정부 시절보다 대내외 경제 여건이 훨씬 어렵다. 주력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고 내수와 신산업에선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규제를 풀어 시장의 힘을 활용하지 않으면 돌파구가 없다.

규제가 만들어진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생명과 안전에 관한 규제가 경제논리에 휘둘릴 때 어떤 참사가 벌어지는지도 목도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모든 규제가 선이요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일자리 늘리는데 도움이 된다면 과감히 규제를 풀어야 한다. 언제까지 ‘규제 완화=악’이라는 도그마에 빠져있을 텐가. 핵심 지지층 반발이 두려워 주저하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국민 삶이 이념보다 우선한다.

고재학 논설위원 겸 지방자치연구소장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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