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전’이라는 행사는 종종 현재를 겨냥한다. 그렇다면 이번 주부터 시작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이장호 회고전’은 2018년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새로움’ 아닐까 싶다. 이장호 감독만큼 한국영화사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감독도 흔치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영화감독으로서 겪었던 세월의 풍파와 오롯이 겹친다.

그는 유신 시기에 데뷔 했다. 첫 영화 ‘별들의 고향’(1974)으로 한국영화 역대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청춘 문화의 아이콘 중 하나가 되었지만, 곧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4년 동안 감독 자격이 정지된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며 자동 복권된 그는 1980년에 ‘바람 불어 좋은 날’로 한층 업그레이드 되어 돌아왔고, 민중의 척박한 현실을 폭로하는 리얼리즘과 한국영화에서 전례가 없던 실험성을 오간다. 신군부의 3S(섹스, 스크린, 스포츠) 정책이 남한의 문화를 장악하던 시절엔, 상업영화의 최전선에서 에로티시즘과 스포츠 영화를 만들었지만 자신의 영화사를 차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8) 같은 극단적인 비주류 영화를 내놓기도 했다.

‘영화 작가’라고 할 때 흔히 테마와 스타일의 ‘일관성’이 담보되어야 한다면, 이장호 감독에게 그 이름은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영화 인생을 되돌아보는 ‘회고전’의 영예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새로운 영화’에 대한 그의 열망 때문이다.

한국에 ‘뉴 시네마’가 있었다면, 그 중심엔 이장호 감독이 있었다. 그 시작은 1975년에 결성된 ‘영상시대’일 것이다. ‘바보들의 행진’(1975)의 하길종, ‘영자의 전성시대’(1975)의 김호선 등과 함께 결성한 ‘영상시대’는 뜻을 함께 하는 영화인들의 느슨한 동인 모임이었지만, 이 시기 그들이 충무로에 내질렀던 선언들은 지금 봐도 서슬 퍼런 포효다. 30대 초반이었던 그들은 구세대의 영화를 감히 “회칠한 무덤 같은 권위주의”로 비판했고, “한국영화계가 관객에게 도덕적으로 불신임을 받아온 것을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영화사에서 이러한 담론을 제기한 건 그들이 처음이었다.

‘영상시대’ 동인들이 자신들의 선언에 맞는 영화를 만들기엔 아직 설익은 상태였다면, 그것을 실천적으로 완성한 사람은 1980년대의 이장호 감독이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담아낸 서울 근교의 현실적인 모습은 당시 영화 운동을 꿈꾸었던 젊은이들에겐 하나의 가능성이었고, 그들은 이장호 감독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엔 충무로 상업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배창호가 있었고, 1980년대 말 이른바 ‘코리안 뉴 웨이브’를 이끈 장선우와 박광수가 있었으며, 독립 다큐멘터리를 개척한 김동원이 있었다. 한국영화의 가장 척박한 시절이었던 1970~80년대, ‘이장호’라는 교차로를 통해 ‘뉴 시네마’가 존재했고, 이것은 현재 우리 영화의 위대한 유산이 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갈수록 클리셰에 의존하고 있는 지금 한국영화에 가장 시급한 전통이다. 1970년대 영상시대, 1980년대 리얼리즘, 1990년대 기획영화, 2000년대 르네상스… 1960년대 황금기 이후 한국영화는 끊임없이 위기를 맞이했고, 이때마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흐름이 등장했다. 그렇다면 2010년대 한국영화엔 그 어떤 시도가 있었나. ‘천만 영화’와 ‘독과점’이 그 대답이 될 순 없을 것이다.

이장호 감독의 ‘바보 선언’(1984) 첫 장면엔 감독이 직접 등장해 투신 자살을 한다. 이때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처럼 내레이션이 흐른다. “활동사진 멸종 위기.” 34년 전 이 장면은 ‘뉴 시네마 멸종 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아니, 더 절실하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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