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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슈퍼 갑(甲)’ 트럼프, ‘모범 을(乙)’ 문재인

입력
2018.09.30 19:0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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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상들의 외교 무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슈퍼 갑(甲)’이다. 초강대국의 힘을 배경으로 제멋대로 행동한다. 평생 ‘을’(乙)과는 먼 삶을 살아왔을 앙겔라 메르켈(독일), 시진핑(習近平ㆍ중국), 아베 신조(安倍晋三ㆍ일본) 등 주요국 정상들이 그의 갑질에 쩔쩔맨다.

그런 측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요즘 매우 예외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아베 총리와의 뉴욕 양자회담에서 문 대통령에게 찬사를 보냈다. “문 대통령의 친절함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나에게 친절했고 또 미국과 우리가 해온 일에 대해서 그랬다”고 말했다. 또 “폭스뉴스와 인터뷰를 했는데 말씀이 대단했다. 우리 회담 이후로 문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 감사 인사를 그가 듣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초만 해도 문 대통령을 싫어했다. 밥 우드워드의 신간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에 그렇게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과 문 대통령을 깔보았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수 차례 통화에서 문 대통령을 거세게 몰아쳤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난하며 “연간 180억달러(20조원)에 달하는 무역적자와 2만8,500명의 주한 미군에 투입되는 35억달러를 묵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착취하고 있다. 안보와 통상을 별개 문제로 다루겠다”고 협박했다. 무례함이 도를 넘어,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이나 렉스 틸러슨 당시 국무장관 등은 문 대통령이 ‘더는 못 참겠다’며 반발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랬던 트럼프 대통령이 바뀐 까닭은 뭘까. 문 대통령만큼 ‘모범적 을(乙)’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름의 국익을 위해 문 대통령이 인내와 양보로 비위를 맞췄기 때문이다. 한미 FTA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7월1일 첫 방미 당시 문 대통령은 워싱턴 한국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FTA 재협상 언급이 없었다”고 일축했다. 그랬던 그가 지난달 뉴욕에서 개정된 FTA에 서명했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미국 자동차가 한국 규격을 맞추지 않고도 연간 5만대나 수출될 수 있게 됐다”고 자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치적인 북미협상도 문 대통령 작품이다. 미 전문지 애틀랜틱은 “문 대통령이 북한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우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을 유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의 찬사를 얻어낸 건 문 대통령이 한미간 불균형 역학관계를 인정하고 ‘갑’의 위치인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을’이 더 유연해야 한다는 걸 인정하고 실천에 옮긴 것이다. 문 대통령은 헐렁한 성격이 아니다. ‘갑’의 위치인 내치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다방면에서 끊임없이 적폐청산을 밀어 붙인다. 힘의 우열을 정확히 파악해 센 상대에겐 몸을 낮춰 뜻을 관철시키되, 반대 쪽에서는 주도권을 놓지 않는다. ‘미유내강’(美柔內强ㆍ미국에 부드럽고 안에서 강하다)이나 ‘북유내강(北柔內强ㆍ북한에 부드럽고 안으로 강하다)인 것도 그런 유연함 때문이다.

‘을’의 입장에서 북미 협상을 이끌어 낸 융통성은 이제 경제정책에서도 발휘돼야 한다. 여당인 민주당은 야당 시절부터 ‘을지로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성과도 있었지만, 경제를 ‘을’의 입장에서만 살피면 그만큼 경쟁이 죽고 효율은 떨어진다. 기업가들 사이에서는 “투자고 뭐고 할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경제가 나빠지면 갑은 손해만 보지만, 을은 생존이 위태롭다. 소득주도 성장을 위해서도 이래서는 안 된다. 월급 오르고 혁신 투자가 이뤄지려면 세금 대신 자본가의 돈이 풀려야 한다. 경제를 살리겠다면, 트럼프나 김정은에 공들인 것처럼만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 을지로 끝난 곳에 퇴계로가 이어지듯, 퇴계로 정책이 나와야 할 때다.

조철환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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