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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도서관과 붉은 여왕

입력
2018.09.30 10:0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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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고 눈을 감은 채 잠시 가만히 있었다. 길게 내쉬는 한숨 소리, 노트북 자판 두드리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낮게 중얼거리는 혼잣말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물 마시는 소리.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억지로 액체를 삼키려 애쓰는 소리였다. 다시 길게 내쉬는 한숨 소리. 아까부터 바로 옆에서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소리였다.

눈을 뜨고 옆자리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을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텀블러를 손에 든 그녀는 마치 먹기 싫은 물약을 삼키듯,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음료를 천천히 마셨다. 책상 위 그녀와 내 구역의 모호한 경계 역할을 하며 놓여 있는 책에는 ‘컴퓨터과학개론’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 앞에 펼쳐져 있는 공책에는 똑 같은 영어 문장이 한 바닥 가득 채워지는 중이었다. 그녀의 길고 긴 한숨 소리가 다시 들려왔을 때, 나는 가방 속에 책과 돋보기와 연필을 챙겨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애 최초로 도서관에 갔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서가와 처음 대면한 순간, 동화 속에 나오는 친절한 거인과 마주친 기분이었다. 햇빛으로 가득 찬 청결한 공간에 놓인 큼지막한 나무 책상들. 바깥세상과는 확연히 다른 질감의 공기. 그 속에서는 어떤 소리도 뭉툭하고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누가 무슨 행동을 해도 지루할 정도로 느리고 무심하게 느껴졌다. 책도 책이지만 번잡한 세상사 모든 것과 무관하게, 무중력 상태 속에 잠겨 있는 듯한 도서관의 분위기에 나는 매혹되었던 것 같다.

평일 오후임에도 도서관 열람실에는 빈 자리가 거의 없었다. 책을 펼쳐 놓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중년과 노년의 남성들이었다. 통로를 지나가다 책상에 놓인 책 제목 하나에 눈길이 갔다. ‘이기는 대화’. 젊은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기도 했지만 그들은 노트북을 켜놓고 있거나 펜을 들고 수험서 같은 것을 풀고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태블릿 PC로 인터넷 동영상 강의를 듣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데스크 탑을 이용할 수 있는 자리 옆을 지나가다가 멈칫했다. 요즘 내 주위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보수 정치가의 얼굴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책상 위에 스케치북을 걸쳐 놓은 채, 그 얼굴을 연필로 정성들여 그리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도서관은 나에게 생활의 허파 같은 곳이었다.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가장 먼저 위치를 확인하고 집에서 얼마나 먼지 가늠해 보는 장소였다. 매일 가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한 달에 서너 번은 들렀다. 세상에 공짜로 책을 빌려주는 곳이 있다니, 책을 빌리거나 돌려주러 도서관에 드나들 때마다 흐뭇해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 도서관 문을 나서면서 내가 떠올린 것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붉은 여왕의 대화였다. 여왕의 손을 잡고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던 앨리스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여왕은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빠르게 앞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쉬지 않고 달려야 겨우 제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어. 앞으로 나아가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하고.”

내가 사랑하는 도서관은, 그리고 책등마다 마법의 주문 같은 제목을 새긴 채 서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은, 이제 제 자리에 머물러 있기도 버거운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점점 중심에서 멀어져 저 멀고 아득한 가장자리까지 떠밀려가고 있는 중인가. 하지만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에 의하면, 진기한 보물은 늘 세상의 한 귀퉁이, 중심과는 한참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깊숙이 숨겨져 있었다. 아니, 그런 말로 위로하려 들지 말자. 중심이든 변두리든, 보물이란 결국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일 테니까.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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