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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대구 10ㆍ1항쟁(10.1)

입력
2018.10.01 04:1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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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일 대구 항쟁이 시작됐다. 마침 그 날은 조선노동당 9월 총파업의 정리집회(사진)가 열린 날이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 항쟁이 시작됐다. 마침 그 날은 조선노동당 9월 총파업의 정리집회(사진)가 열린 날이었다.

1946년 10월 1일 오후 대구 시민 1,000여 명이 시청(당시 부청) 앞에 집결, 쌀을 달라며 시위를 시작했다. 경찰이 공포탄을 쏘며 해산에 나서자 분노한 시민들은 저지선을 뚫고 아예 경찰서(현 대구 중부서)까지 행진을 벌였다. 군중들이 가세하면서 저녁 무렵 시위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경찰의 실탄 발포로 시민 두 명이 숨졌다. 다음날 시위대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고, 경찰의 대응 사격으로 시위대 17명이 또 숨을 거뒀다. 군중들은 경찰서 무기고를 털어 무장했고, 미군정청은 저녁 7시 대구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투입했다. 대구 10ㆍ1항쟁(또는 사건)이었다.

미군정기 서민들의 굶주림은 당국의 부패와 쌀배급 혼선까지 겹쳐 어디나 극심했다. 대구의 기아가 유독 심했던 건 그 해 여름 대구ㆍ경북 지역에서 콜레라가 발생해 순식간에 2,000여 명이 감염되자 군정청이 일대를 봉쇄했기 때문이었다. 군정청의 하곡 강제수매로 쌀이 동난 데다 차량 및 인력 이동마저 차단되자 돈이 있어도 쌀과 생필품을 구할 수 없게 됐다. 당국은 그 비상사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가뜩이나 감정이 안 좋던, 친일파 경찰이 불씨를 지핀 거였다.

대구가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릴 만큼 좌익 활동가와 노동운동 세력이 강했던 점도 항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 그날은 조선노동당이 주도한 9월 총파업의 대구지역 정리 집회가 열린 날이었다. 그런 사정 때문에 처음부터 박헌영 노동당의 사주로 시작된 ‘폭동’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굶주린 서민들의 자발적 대책 요구 시위에 파업 노동자들이 가세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지역 노동당 지도부는 그 사태에 누구보다 당혹해 했고, 오히려 폭력시위의 자제와 중단을 호소했다.

미군의 개입으로 대구 항쟁은 이내 잦아들었지만, 공식 집계로 대구ㆍ경북에서만 136명(경찰 등 공무원 63명 포함)이 희생됐고, 노동당 간부였던 박정희의 형 박상희도 그 와중에 숨졌다. 항쟁은 경북을 넘어 경남과 전남ㆍ북, 충청과 서울 경기, 강원ㆍ황해도까지 확산되며 가히 남한 전역에 걸쳐 2개월 넘게 이어졌다. 좌파의 아성 대구는 5ㆍ16 이후 한때 좌익이던 박정희 사상세탁의 표적이자, 독재 인맥과 패권의 구심이 돼갔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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