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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중소기업이 사는 법

입력
2018.09.26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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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지방의 한 산업공단에 위치한 제조업체 임원입니다. 직함만 임원이지, 제품 개발과 영업, 경영 기획 등 회사에서 하지 않는 업무가 없습니다. 여느 중소기업 임원들이 모두 그렇지요. 회사는 소위 재하청 업체입니다. 대기업이 발주한 제품 생산을 하청업체가 받고, 하청업체가 이를 다시 쪼개면 그 일부나 부품을 생산ㆍ납품하는 회사죠. 나이는 곧 50대에 접어듭니다. 신분이 노출되면 곤란해지니 소개는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추석 전 9월 초부터 정신 없이 바빴습니다. 일감이 밀려들었다면 좋았겠지요. 요새 경기가 예전 같지가 않아 일감은 되레 줄었네요. 바빴던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일을 주는 하청업체를 돌며 사람들을 챙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소위 ‘떡값’을 돌리며 ‘관리’하는 것이죠. 백화점ㆍ구두 상품권을 대량 구입해서 추석 전에 챙겨야 할 사람들을 찾아가 ‘추석 선물’로 줬습니다. 생산량은 줄고 비용이 늘면서 영업이익은 수개월째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번 추석 때도 1,000만원이 넘는 상품권을 구입해 뿌렸습니다. 사장이 대출을 끌어와 구입했죠. ‘성의’ 표시 정도만 하는 대상도 있지만, 대부분 하청업체 팀장급 이상이어서 여러 장을 쥐여줍니다. 팀원들 챙겨주라는 의미죠.

아직도 이러느냐고요? 우리 같은 재하청 업체는 한둘이 아닙니다. 어느 회사에 일감을 주느냐는 전적으로 이들 하청업체들이 결정합니다. 우리뿐 아니라 일감을 얻으려는 재하청 업체들은 모두 이렇게 ‘접대’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줬던 일감을 다른 업체에 주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죠. 하청업체들도 대기업 임직원들 관리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순 없을 겁니다.

‘상납금’도 있습니다. 일을 주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관계자들에게 찔러주는 돈이죠. 우리 회사도 5명에게 매월 각 100만원씩 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현금입니다. 그 사람들 친인척 명의로 된 차명계좌로 보내기도 하고요. 관계를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물량이나 일감을 더 배정해줄지도 모르잖아요. 중국에만 ‘꽌시(关系ㆍ연줄)’ 문화가 있는 게 아니죠. 우리나라도 그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줄을 대려고 혈연, 지연, 학연 모두 동원하는 것은 기본이잖아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말은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살아남는 게 정의로운 것이니까요.

추석이 끝나니 걱정이 커집니다. 연휴가 끼면서 이달 매출은 평소의 70%도 못했네요. 일감은 줄어들고 적자 폭은 확대됩니다. 거기에 최저임금은 올랐고요. 납품가격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대기업도 비용 절감에 나서 올려줄 생각이 없으니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말도 못 꺼냅니다. 정부(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에 요구하라지만, 그랬다가 일감 뺏기면요? 시장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지금은 버티기 싸움입니다. 누가 먼저 쓰러지느냐만 보고 있는 거죠. 그 일감이라도 가져올 생각에 빚내서 버티는 겁니다. 경쟁 업체가 무너져야 기회가 생기는 현실이죠. 우리는 작년 초까지 설비투자를 늘려놔 물량만 가져온다면 희망이 보일 텐데, 업황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내년 최저임금도 올랐으니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작년보다 올해 인건비만 50%가 늘었더군요. 당장 내달 4~5명 내보낼 계획입니다. 고용도 당분간 없다고 봐야죠. 채용공고를 내도 60대 노인분들만 지원하고 젊은 사람들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외국인 근로자 아니면 뽑질 못하죠. 이제 그마저도 잘라야 할 판이네요. 경기가 솟아날 기미가 안 보여 정말 걱정입니다. 정부가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는 추진력을 경제 살리기에도 십분 발휘해주면 좋겠습니다.

※추석 때 지인인 중소기업 경영자와 나눈 대화를 글로 옮겼다. 그는 굴지의 대기업 생산 제품에 들어가는 부속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한다.

이대혁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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