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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EAㆍ북한 기나긴 ‘줄다리기’ 이제는 끝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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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EAㆍ북한 기나긴 ‘줄다리기’ 이제는 끝나나

입력
2018.09.25 17:00
수정
2018.09.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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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자회담 2·13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올리 하이노넨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 부총장을 비롯한 IAEA 실무 대표단이 6월 26일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해 북한측 관계자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7년 6자회담 2·13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올리 하이노넨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 부총장을 비롯한 IAEA 실무 대표단이 6월 26일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해 북한측 관계자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는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인 폐기와 같은 의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일 2박 3일의 평양ㆍ백두산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대국민 보고에서 이같이 말했다. 9월 평양공동선언 5조 2항에 담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 합의에 있어 별도로 적시하진 않았지만 사찰ㆍ검증의 의미를 사실상 포함하고 있다는 선언이다.

평양 남북정상회담과 다가올 2차 북미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한반도는 이른바 ‘진실의 시간’으로 불리는 북한 핵사찰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한번도 성공한 적 없는 단계지만, 남북 정상간 톱다운 방식이라는 진행된다는 점에서 ‘이번엔 다를 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커지는 모습이다.

특히 사찰 주체로 유력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북한이 핵사찰을 둘러싼 오랜 악연을 마무리지을 수 있을지도 관심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19일(현지시간) 차기 북미 고위급 협상 장소로 IAEA 본부가 위치한 오스트리아 빈을 지목, IAEA를 핵사찰 주체로 적극 내세우고 나섰다. 1992년부터 약 26년간 북한과 줄다리기를 거듭하며 쌓인 경험치도 ‘IAEA 사찰설’에 한몫 하고 있다. IAEA의 북한 핵사찰 실패의 경험이 곧 다가올 핵 사찰ㆍ검증의 성공 여부를 가를 과제를 담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이 1992년 5월 촬영한 북한 영변 25mW 원자로.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이 1992년 5월 촬영한 북한 영변 25mW 원자로. 한국일보 자료사진

①‘미신고 폐기물저장소’ 못 밝힌 최초 사찰

1989년 미국이 영변 핵시설을 통한 북한 핵무기 개발 움직임을 최초 공론화하면서 이를 억지하려는 국제사회 압박도 시작됐다. IAEA가 전면에 나서 1992년 1월 북측과 안전조치협정에 서명, 이후 4개월만에 북측으로부터 핵시설 현황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 받음에 따라 최초 핵사찰도 개시됐다.

IAEA의 사찰은 1992년 5월부터 네 달간 큰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용준 전 6자회담 차석대표는 저서 ‘게임의 종말’에서 “초기 북한은 기대 이상으로 IAEA 사찰단에게 상당히 협조적이었다”며 “IAEA는 1992년 8월 제3차 임시핵사찰에서도 북한의 불법적 핵활동에 관한 특별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자 이러한 평가를 곧 공식 발표하려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9월 ‘시한폭탄’이 터졌다. 미국 정부가 북한이 미신고한 영변 내 핵폐기물저장소 2곳과 이를 은폐하려는 시도가 담긴 첩보위성 자료를 공개한 것. 위성 화면 속 폐기물저장소 추정 건물과 그 위를 덮어 만든 숲 등 은닉 시도를 부인할 수 없는 증거였다.

이후 상황은 급반전했다. IAEA는 12월 22일 북측에 추가 사찰을, 이후 특별사찰 협의도 요청했지만 북한은 두차례 모두 거부했다. 북한이 이듬해 3월 12일 결국 핵환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최초 핵사찰은 실패로 돌아갔다. IAEA도 1994년 북한 핵사찰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공식 선언했다.

미국 정부가 1993년 공개한 첩보위성 자료. 북한 영변 핵단지 내 북측이 자진신고한 재처리시설(왼쪽 아래)과 폐기물저장소(오른쪽 가운데) 사이로 미신고 폐기물저장소가 표시돼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국 정부가 1993년 공개한 첩보위성 자료. 북한 영변 핵단지 내 북측이 자진신고한 재처리시설(왼쪽 아래)과 폐기물저장소(오른쪽 가운데) 사이로 미신고 폐기물저장소가 표시돼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②제네바 합의 후 HEU 프로그램 논란

IAEA의 핵사찰 포기 이후 미국으로 대북 협상의 공이 넘어가면서 1994년 10월부터 약 8년간 ‘제네바 합의’ 체제가 유지됐다. 미국은 영변 핵심 핵시설을 동결(가동 또는 공사 중단)하는 대가로 북측에 1,000㎿급 경수로 2기와 연간 중유 50만t 제공을 약속했다.

경수로 완공을 2~3년 앞둔 2002년 북ㆍ미는 미뤄왔던 핵사찰 문제를 다시 마주했다. 북측이 50㎿ 원자로, 핵연료봉 공장 등 평북 영변ㆍ태천의 핵심 5개 핵시설을 동결한 때였다. 미국 측은 북한 핵포기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조기 경수로 완공과 동시에 조기 핵사찰을 제안했다.

눈앞에 다가왔던 핵사찰은 결국 북한의 거부로 무산됐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의 평양 방문 전후로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진실 공방이 펼쳐지는 동시에 사찰 국면은 또다시 일단락됐다.

아델 톨바 IAEA 검증감시단장이 2007년 7월 14일 고려항공편으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셔틀버스에서 내리고 있다. AP연합뉴스·한국일보 자료사진
아델 톨바 IAEA 검증감시단장이 2007년 7월 14일 고려항공편으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셔틀버스에서 내리고 있다. AP연합뉴스·한국일보 자료사진

③‘핵프로그램’ 범위 두고 갈등한 2008년

9ㆍ19공동선언과 10ㆍ3합의의 이행 차원에서 시작된 2008년 핵사찰도 1994년과 2002년 사찰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7년 북ㆍ미는 10ㆍ3 합의에서 핵시설 불능화와 함께 같은해 12월 31일까지 핵프로그램 신고를 마치기로 결정했다.

이번 복병은 ‘핵프로그램’의 범위였다. 북측은 핵시설 신고만을 주장했지만, 미국은 제네바 합의 불발 당시 쟁점이었던 HEU 프로그램의 공개도 원했다. 더불어 1992년 보고서에 누락했다 들통 난 미신고 폐기물저장소 관련 목록이 포함되는지도 관심 대상이었다.

북측은 또다시 핵 포기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HEU 프로그램은커녕 이미 첩보위성에 노출된 미신고 시설도 공개되지 않았다. 최초 핵사찰 당시 북측이 축소 신고해 문제시됐던 핵물질(플루토늄) 양도 또다시 IAEA 추정치와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2008년 4월 북한은 공식적으로 핵협상 파기를 선언했다. 이어 9월 24일 북측이 IAEA의 재처리시설 봉인과 감시 장비를 일방적으로 제거하면서 10년의 암흑기는 시작됐다.

◇미신고 폐기물저장소ㆍ우라늄 농축시설 신고가 관건

북한 핵사찰 주요 전례를 되짚어보면, 현재 임박한 영변 핵시설 폐기 및 검증의 관건은 기존 미신고된 핵폐기물저장소와 우라늄 농축시설의 신고 여부로 귀결된다. 영변 핵 단지 내 390여개 시설 중 ‘항구적 폐기’를 위한 필수 사찰 대상이기도 해 이를 반드시 넘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한미정상회담 이후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다가오면서 남북미 간 통상적인 ‘핵시설 신고→검증→폐기’ 순이 아닌 새로운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25일 연합뉴스에 “폼페이오 장관 인터뷰의 특정시설, 무기시스템 언급 등을 고려하면 김정은 위원장이 핵무력 및 관련 제조시설 부분에 대해 무엇인가 구체적인 언급을 준 것 같다”며 “핵탄두 등 부분을 (북미 협상) 의제에 포함할 용의가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을까 한다”고 예측했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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