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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제재가 사람 말고 북핵만 잡게 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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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제재가 사람 말고 북핵만 잡게 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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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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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북미 간 협상이 북측의 전향으로 올 들어 급진전하면서 지난해 말까지 일촉즉발이던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감이 눈에 띄게 확 누그러졌다. 마냥 잘 풀리지는 않아도 완연한 대화 분위기다.

그렇다고 미국이 압박 정책을 철회한 건 아니다. 숨통을 조여야 북한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할 거라는 소신은 변함없다. 대표적 수단이, 대외 경제 거래를 틀어막아 북한을 고립시키는 대북 제재다. 핵 개발 활동에 필요한 물자와 금전의 공급선을 끊어 북 정권을 곤경에 빠뜨리는 게 목표인 이 전략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미국은 믿고 있다.

1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대북 제재 결의 위반 여부 논의를 위한 안전보장이사회 회의가 열리고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1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대북 제재 결의 위반 여부 논의를 위한 안전보장이사회 회의가 열리고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대북 제재 장기화에 죽어나는 北 주민

집요하게 종전(終戰)선언을 요구하며 미국과의 군사적 적대관계를 이만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북한이지만 경제적 적대행위인 제재에 대해서는 태도가 다르다. 장기전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맞서 버텨보겠다는 것이다. 지난달 17일 북한 주민들이 주요 독자층인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면에 김 위원장의 강원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 현장 시찰 소식을 싣고 “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과 같은 방대한 창조 대전은 강도적인 제재 봉쇄로 우리 인민을 질식시켜보려는 적대 세력들과의 첨예한 대결전이고 당의 권위를 옹위하기 위한 결사전”이라는 김 위원장의 언급을 전했다.

철썩 같은 미국의 신념에도 제재의 효용 가치는 논란거리다. 제재가 지속되면 경제 건설이 더뎌지기는 하겠지만 얼마간이라도 견딜 수 있는 제재와 당장 생존과 직결되는 핵을 북한이 바꾸려 하지는 않으리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나아가 관성적 제재가 도리어 북한 비핵화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반론도 상당하다. 21일 기자들을 만난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이제는 ‘제재를 위한 제재’가 아니라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제재가 돼야 한다”고 했을 정도다.

부작용도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북미 정부 간 신경전으로 장기화하는 제재 국면에 죽어나는 건 애먼 북한 주민들이다. 제재가 대상국 주민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줄이기 위해 ‘인도주의적 면제’라는 안전 장치를 국제사회가 갖춰두고는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여러 사례로 증명돼 왔다. 대북 제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06년 10월 북한의 첫 핵실험 직후 의결한 결의 1718호를 시작으로 지난해 11월 북한이 감행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 시험발사에 대응해 한 달 뒤 통과시킨 결의 2397호까지, 11년 동안 총 10건의 대북 제재 결의를 채택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매번 ‘제재가 북한 주민의 인도적 상황에 악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제재 회피에 악용될 여지가 있다는 지적으로부터 인도주의적 대북 지원이 자유로운 적은 없었다.

이번이야말로 결정적 비핵화 기회라고 판단한 미국이 제재망(網) 이완 단속을 더 강하게 하는 통에 인도주의적 대북 지원 여건은 과거 어느 때보다 좋지 않다. 시퍼런 미국 서슬에 지레 위축된 유엔 회원국ㆍ국제기구ㆍ비정부기구 사이에서 막연히 ‘나중에 뒤탈 날지 모르는 일은 벌이지 말자’는 식의 소극적 기류가 만들어질지 모른다는 게 전문가들의 걱정이다.

지난달 유엔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원회가 ‘대북 인도주의적 지원 제공을 위한 면제 관련 가이드라인’을 채택한 건 이런 배경에서다. 가이드라인이 제공하고 있는 정보는 대북 지원을 위해 안보리에 인도주의적 면제를 신청할 때 참고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과 절차다. 규모 등 지원 물품에 대한 설명, 지원 관련 당사자 및 금융 거래, 지원 품목 전용(轉用) 방지 조치 등 10가지가 기재된 서류를 회원국이나 국제기구 등이 대북제재위에 제출하면 제재위는 면제 요청을 가급적 신속히 처리할 거라고 가이드라인은 밝히고 있다.

20일 백두산 등정을 위해 삼지연 공항에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영접을 위해 도열한 주민들과 인사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20일 백두산 등정을 위해 삼지연 공항에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영접을 위해 도열한 주민들과 인사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제재 주도 美가 만든 면제 가이드라인

미국이 초안을 만든 이 가이드라인에 대북 인도 지원을 거드는 척하며 구멍을 메워 대북 제재망을 더 촘촘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예 없지 않겠지만, 선의(善意)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는 의견이 대체적이다. 도경옥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그간 제재 체제에서 제대로 기능을 못한 인도주의적 면제 메커니즘을 개선하려면 해당 메커니즘에 대한 지원 주체들의 이해도를 높이는 한편 면제 부여 기준과 절차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이번에 제재위가 채택한 가이드라인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라고 평가했다.

북측의 전향에 화답해 남북관계 개선 방안을 모색 중인 한국 정부는 한층 더 적극적이다. 4ㆍ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직후 보건복지부 내에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하고 보건ㆍ의료 분야 대북 지원 방안 검토에 착수한 데 이어, 남북 정상이 19일 서명한 ‘9월 평양공동선언’에 “남과 북은 전염성 질병의 유입 및 확산 방지를 위한 긴급 조치를 비롯한 방역 및 보건ㆍ의료 분야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라는 문구를 포함시켰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남북 정상이 발표한 ‘10ㆍ4 정상선언’을 계기로 추진되다, 2010년 3월 일어난 천안함 폭침 사건 직후 이명박 정부가 대북 응징 차원의 대북 제재인 ‘5ㆍ24 조치’를 발동한 뒤 대부분 중단됐던 보건ㆍ의료 분야 인도적 협력 사업의 재개를 위한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유엔이 파악한 북한의 보건 실태는 심각하다. 강영식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총장은 최근 전혜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최 정책 토론회에서 유엔 북한팀이 작성한 보고서 ‘2018 북한 필요와 우선순위’의 내용을 인용, “북한 전체 인구의 41%에 달하는 1,030만명의 주민들이 지속적인 식량 불안정과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고 주장했다. 마크 로우코크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장은 7월 방북 기자회견에서 “농촌 아동 절반 이상이 깨끗한 물을 공급 받지 못하고 있고 아동의 20%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우려되는 건 만연한 결핵이다. 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가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북한 내 결핵 환자 수는 전년보다 2만명 많아진 13만명이었고, 2015년보다 2배 넘게 많은 1만1,000명이 결핵으로 사망했다. 두 가지 이상의 치료제에 내성을 가진 다제내성 결핵균(슈퍼 결핵)에 감염된 환자는 5,700명에 이른다고 한다. 결핵 발생 건수 및 사망자가 줄고 있는 지구에서 북한은 시간이 멈춘 섬 같은 곳이다.

이는 대북 인도 지원을 위한 국제사회 공조의 강력한 명분 중 하나다. 이달 하순 열리는 제73차 유엔 총회 기간이 한국 정부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26일 마리아 페르난다 에스피노사 총회 의장 주재로 ‘결핵 퇴치를 위한 회의’가 진행된다. 조은정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북한에 퍼져 있는 슈퍼 결핵균이 주변국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 데다 향후 극동 지역의 물류와 인적 교류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북한의 공중보건 수준을 높이는 일은 긴요하다”며 “결핵 퇴치를 위한 유엔의 노력에 적극 동참하는 건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책임이기도 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인도적 대북 사업들이 계속 이뤄져 가시적 성과로 나타나고 북한 당국ㆍ주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미 제재 해제 지연의 악영향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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