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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지 일해도 2만원 남짓... 일자리 없어 난린데 노인이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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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지 일해도 2만원 남짓... 일자리 없어 난린데 노인이 어쩌겠어”

입력
2018.09.21 04:4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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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동대문역 9번 출구로 나가는 역사에서 실버택배 요원들이 택배물품을 정리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지난 19일 동대문역 9번 출구로 나가는 역사에서 실버택배 요원들이 택배물품을 정리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하나는 이수역, 하나는 신림동.” “아, 이거 너무 무거운데.”

지난 19일 오후 서울 동대문종합시장 앞 대로변은 배달용 오토바이, 그리고 노인들로 북적댄다. 150m 가량 늘어진 도로 안쪽 인도 역시 간이의자에 앉은 노인과 배달할 짐들로 사람이 지나갈 틈을 찾기 어렵다. 자신의 허리가 넘는 길이의 원단봉(두루마리 형태로 감아놓은 원단)을 나르는 노인, 지퍼 등 의류 부자재를 잔뜩 담은 검은 비닐봉지를 어깨에 둘러멘 노인 등이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 9번 출구로 꾸준히 들어간다. 일명 ‘실버택배’(지하철 무료 승차가 가능한 만 65세 이상 노인들이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 하는 택배 서비스) 배달원들이다.

5년째 주6일 출근도장을 찍고 있다는 박상권(73ㆍ가명)씨는 다음 배달을 기다리며 간이의자에 앉아 드링크제 한 병을 들이켰다. “추석을 앞두고 어제오늘은 좀 바쁜데 이렇게 뛰어도 예전 같지 않지. 월 50~60만원 정도 벌라나? 처음 일 시작할 때는 100만원 정도는 됐는데, 여기 시장 경기가 안 좋아지니까 배달 주문도 계속 줄었어.”

도매시장들이 몰려있는 동대문은 서울 시내에서 ‘실버택배’가 가장 활발한 곳이다. 박씨 같은 노인 배달원이 이 거리에만 80명이 넘는다고 한다. 거리에 테이블 하나 놓고 주문 내용을 적을 공책 한권 펴놓으면, 이들에겐 거기가 사무실이다. 업체들마다 박씨 같은 배달원이 수십명씩 등록돼 있다. 주문이 오면 보통 순번대로 돌아가며 배달 일감을 받는다. 일이 적을 때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의자에 앉아 주문 전화를 기다리기 일쑤다. 5년 전만 해도 하루 10건씩 달했던 배달 횟수는 요즘 6,7건 수준으로 줄었다.

노인들이 배송하기 때문에 물품이 가벼울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최명광(76ㆍ가명)씨는 곧 배달할 박스를 가리키며 “들어볼래요?”라고 한다. 들자마자 ‘헉’ 소리가 난다. 7~8kg은 거뜬히 넘는 느낌이다. 최씨는 “이 정도 무게는 자주 배달 다닌다”고 말했다. 상당한 육체 노동이지만 다들 “(택배)일하려는 사람은 널려있다”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일감은 줄어드는 데 일할 사람은 많다 보니 단가는 갈수록 낮아진다. 배달 1건당 요금이 4, 5년 사이에도 20% 가까이 떨어졌다. 4년째 일하고 있다는 김철상(77ㆍ가명)씨는 “예전에는 1만원 받던 거리를 요즘은 8,000원 정도 받는다”고 푸념했다. 업체에 수수료로 25~30%를 떼주고 나면 남는 돈은 얼마 안 된다. 오전 9시쯤 나와 오후 7시, 늦게는 밤 10시까지도 일하는데 요즘은 하루 2만원 정도 겨우 손에 쉬고 돌아가는 날이 잦다. 강북구에서 부인과 단둘이 사는 김씨는 “농사 짓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안 해본 일 없이 하면서 아들 4명 장가 보내고 나니 노후 생활비가 필요하다”며 “노인들 일할 자리가 어디 있냐. 이거라도 해야지”라며 부지런히 다음 배달을 나갔다.

실버택배의 열악한 현실은 노인 일자리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퇴직 연령은 낮아지고 노년기는 길어져 일해야 하는 노인 수는 늘어나는 데 마땅한 일자리는 없다. 하지만 한창 일해야 할 나이인 청년층의 일자리가 더 심각한 상황에서 노인 일자리 문제는 뒷전에 밀린 지 오래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인생 이모작 준비를 못한 채 은퇴한 노인들은 결국 자신의 평생 직무 경험과 관계없는 임시, 일용직 일자리를 전전하는 상황”이라며 “민간 일자리는 찾기 어렵고 정부가 만든 일자리는 보조금을 쥐어주는 수준에 그친다”고 지적했다.

동대문 시장 인근에도 정부 지원을 받는 실버택배업체가 있다. 배달 건수와 상관없이 1인당 월 15만원가량 지원금이 나온다. 정부는 이를 시장형 일자리로 분류하지만 그 이름이 무색하게 수익을 내지는 못한다. 이 업체 관리자는 “3년전 1인당 하루 3건씩은 배달했다면 지금은 절반으로 건수가 줄었다”며 “생활비를 번다기보다는 용돈 조금 얻고 사람들 만나러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 업체에서 올초부터 택배 일을 시작한 정한상(75ㆍ가명)씨는 “비 오는 날 꽃 배달을 하는데 꽃이 상할까 봐 나는 비를 맞고 꽃에 우산을 씌워 간 적도 있다”며 “그렇게 해도 추석에 만날 손자 과자값도 안 된다”고 하소연했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대며 다음 주문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젊은 애들 일자리도 없다는데, 노인들이야 어쩌겠어.”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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