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16>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이진순

‘열림’으로 5년간 122명 만난 ‘전문 인터뷰어’
‘와글’ 만들어 온라인 시민참여 정치모델 실험
‘열림’과 ‘와글’의 이진순씨를 18일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에 있는 와글 사무실에서 만났다. 비영리 법인인 와글은 ‘풀뿌리 정치 실험실’이다. 대표인 이씨를 포함해 5명이 상근 멤버다. 고영권 기자

‘열림’은 어쩌면 자신의 생을 압축한 말이었는지 모른다. 대통령 하나 내 손으로 뽑지 못하는 닫힌 사회를 바꿔보고자 싸워봤고, ‘그럼에도 아직 믿어볼 만한 세상’이라는 희망을 지닌 122명의 마음을 열고 들어가 보기도 했다. 이제 그는 시대 변화에 눈 감고 귀 막은 정치의 벽 앞에 서있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아니 열려야 한다. 열리지 않으면 어떡할 건데?’ 이런 생의 믿음과 의지가, ‘열림’이라는 두 글자에 담겨 있는 것이다. 사람을, 세상을, 지독하게 사랑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족적이다.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 시민’.

이진순(55)씨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제는 여기에 ‘인터뷰어’라는 수식어도 덧붙일 수 있겠다. 2013년 6월 시작해 올해 8월 끝낸 연재 ‘이진순의 열림’에서 5년 간 122명을 인터뷰했으니. 3년 전에는 비영리 재단법인 ‘와글’을 만들어 ‘진짜 새 정치’에 뛰어들었다. ‘와글’은 대표인 이씨를 포함해 5명이 멤버인 ‘풀뿌리 정치 실험실’이다. 디지털이란 도구가 어떻게 시민 참여를 촉진 시킬 수 있는지, 정치권이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계속 정치를 하면 왜 안 되는지를 기획하고 증명한다. 디지털 시대의 청년 리더들을 발굴하고 키우는 것도 와글의 중요한 사업이다.

“많은 이들이 ‘열림의 이진순’하고, ‘와글의 이진순’이 다른 사람인 줄 알더라고요. 동일 인물인 줄 몰랐다는 사람들도 여럿 만났고요. 공정이야 다르지만, 제게는 같은 일이죠. 둘 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이잖아요.”

말이 쉽지, 기자도 아닌 외부 필자가 신문 2개 면을 채우는 인터뷰를 수년 간 연재하는 건 기록적인 일이다. 고작 반 년이지만 해보니 짐작이 간다. 5년 간 그가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오르며 숨가쁘고 뿌듯하고 막막하고 보람찼을지. 진득한 눈물의 농도와 빼곡한 생의 밀도가 그의 삶에도 배었을 테다.

“우스갯말로, 제가 ‘풀 타임으로 일하는 파트 타이머’였다고 말해요. 하하. 끈기요? 글쎄요. 사람을 좋아하고 오지랖이 넓었으니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와글’은 ‘열림’과도 일맥상통하는 시도다. 취지야 좋지만,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정치가 그렇게 시민의 요구대로 잘 변해왔다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니까. 이른바 ‘386 세대’로서, 누구보다 이를 잘 아는 그가 시동을 건 이유가 있다. ‘87년산(産) 진보론’이다.

“진보가 무슨 와인인가요? 나는 ‘87년산 진보’라서, 오래됐으니 더 비싸고 맛이 좋다? 과거 87년 (민주화) 운동했던 시절에 만들어진 시각과 태도로 정치하는 것, 이게 진보인가요? 이런 건 보수죠. 다른 영역은 다 바뀌는데, 정치만 변하지 않으면 체증이 생기지 않겠어요?”

‘열림’에서 잔잔했던 그는, ‘와글’에 이르자 폭발했다.

◇글로 써 본 인터뷰는 ‘열림’이 처음
그는 30대에 방송작가로 활동했으니 인터뷰는 해봤지만, 글로 써본 건 ‘열림’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평생 인터뷰 한 번 한 적 없는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선생을 만나려고 한 달을 공을 들이기도 했다. 채 선생의 철학이 담긴 인터뷰가 세간에 두고 두고 화제가 된 건 물론이다. 고영권 기자

-5년 간 122명을 인터뷰 하다니 대단해요.

“오래 했으니까요. (웃음) 기사를 연재해준 ‘한겨레’에 많은 혜택을 받았지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미국에서 (유학과 교수 생활을 마치고) 2013년에 귀국했는데, 그때 마침 전임 인터뷰어였던 김두식 교수(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가 그만 두게 됐어요. 김 교수와 담당 에디터가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를 하더라고요. 김 교수의 추천으로 이미 작은 칼럼을 쓰기도 했었고요.”

-인터뷰를 글로 써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죠?

“그렇죠. 방송 작가 생활은 해봤지만. 그러니 처음에는 서너 번 에디터에게 ‘까이면서’ 썼죠. ‘에이, 나 못해요’, ‘안 할래요’, ‘다른 분 시키세요’ 하기도 했어요. 고치라는데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웃음) 나중에는 ‘에라, 내 식대로 쓰자’ 했는데 그 원고를 에디터가 만족스러워 하더군요.”

그는 지금도 5년의 기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출력해둔 녹취록과 취재원의 자료가 종이상자 여러 개에 담겨 베란다를 채웠다. “여기에도 있을 걸요”라며 내민 수첩에는 마지막 인터뷰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그는 이런 수첩이 18권이라고 했다.

-시작할 때 두려움은 없었나요?

“걱정이 많이 됐죠. 사람 만나고 얘기 듣는 건 좋아하지만, 나는 말하자면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인데, 무슨 힘으로 이걸 끌고 가나 하는. 어떻게 차별성을 살릴 수 있을지도 고민이 됐고요.”

-그래도 해보는 걸 전제로 한 고민이었네요.

“일단 해보자는 생각이 컸거든요. (웃음) 인터뷰는 굉장히 주관적인 글이라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러니 나는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인가, 나라는 프리즘은 어떤 건가, 그런 내가 이 사람한테 왜 이런 게 궁금했는지 정직하게 밝히고 인터뷰를 풀어나가려고 했죠. 나의 시선을 따라 그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인터뷰이를 선정할 때 기준이 있었나요?

“제가 만났던 사람들을 돌아보니 ‘그렇구나’ 하는 일종의 사후적인 평가인데요. 인터뷰 할 때 여러 번 던진 질문이 있더라고요. 특히 사람에, 세상에 상처 받았던 분들한테, ‘그래도 사람을 믿으세요?’라든지, ‘그래도 세상이 변한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했어요. 그런 걸 보면 부지불식 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생각하고 좋아하는 이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기준이 있었던 거 같아요.”

-인터뷰는 섭외가 8할인데요.

“후반으로 가면서 수월해지긴 했어요. ‘이진순의 열림’이라고 하면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응해주시는 분들이 생겼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제가 열심히 쫓아다니고 설득해도 안 되는 경우도 있었죠.”

-원래 꿈이 기자였다고요?

“어렸을 때 한번쯤 갖는 꿈 아닌가요? (웃음) 고등학교 때 사회학과를 지원한 건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긴 했어요. 대학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그게 아니구나’라고 깨달았고. (웃음) 제가 82학번인데, 그 시절에 신문은 그야말로 (정권에서 쓰라는 대로 쓰는) ‘개판’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사회학과가 그렇게 데모를 세게 하는 덴 줄 몰랐죠.”

시절은 그를 첫 서울대 총여학생회장으로 만들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외치다 구속이 됐고, 나와서는 서울 구로공단에 여공으로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을 했다. 그는 이 시기의 얘기를 자세히 하기를 꺼렸다. “할 사람이 없어 총여학생회장도 했고, 그러면 감옥 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건 80년대 학생운동 했던 사람이면 다 겪은 일이지 특별한 게 아니다”라면서.

“나중에 복학이 되긴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 때(출소했을 때)는 상관 없이 나는 공장 노동자로 살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일당 3,300원 받는 여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조합도 만들고 파업도 했죠.”

-그 시기가 자신한테 준 의미는 뭔가요?

“음… 글쎄요. (몇 초간 생각하더니) 쉽지 않은 질문이네요. 나 때문에 세상이 달라졌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이런 힘은 생겼죠. ‘내가 이런 것도 해봤는데 이 정도 가지고 겁을 내나?’ 살면서 누구나 힘든 순간이 있잖아요. 그럴 때 ‘옛날에 등 따순 데 찾아서 도망가지 않았잖아. 근데 지금 이런 것도 못하면 너무 맛이 간 거 아니야’라면서 나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게 만드는 거죠. (웃음) 나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야 할 때 도움이 되는 것 같네요.”

◇122명과의 만남, 노화를 지연시킨 방부제
그는 5년 간의 인터뷰 중 12명의 이야기를 골라 올해 8월 책으로 묶었다. 김주영 기자

6년 여의 여공 생활을 끝낸 뒤엔 방송 작가로 일했다. 서른이 넘어 방송사로 갔으니 ‘최고령 보조 작가’였다고 한다. 5, 6년 차부터는 메인 작가가 됐고 ‘100분 토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같은 굵직한 시사ㆍ다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아직도 그가 기억하는 클로징 멘트가 있다.

“방송사에 들어갈 때도 방송으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1997년 ‘MBC 스페셜’에서 ‘6월 항쟁’ 10년을 주제로 다뤘어요. ‘87년’ 이후 10년이 지났는데, 과연 세상이 바뀌긴 한 것이냐는 물음을 가질 때였죠.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자료화면을 죄다 찾아서 보는데, 볼 때마다 눈물이 나더라고요. 제가 겪은 일이기도 했으니까요. 그 때 원고는 정말 많이 울면서 썼어요. 가장 큰 고민은 ‘6월 항쟁이 우리한테 남긴 건 뭔가라는 질문에 답을 어떻게 할 것인가’였죠. 다큐 마지막 장면이 ‘이한열 장례식’에서 시민들이 갑자기 ‘청와대로 가자’ 해서 몰려가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 소리에 흩어지는 거였거든요. 그리곤 클로징 멘트가 나갔는데 이거예요. ‘그날 그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직 남아 여기에 살고 있다.’ 얼마나 고민해서 썼으면 2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기억을 하겠어요? 하하. 그간의 변화가 새로운 세상을 열기에는 부족해서 실망스럽지만, 이게 끝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죠. 우리가 아직 여기에 살아있는 존재로 있다는 것, 그래서 뭔가를 더 해낼 수 있는 잠재력이 있으니 포기하지 말자는 거죠.”

-미국 유학은 왜 간 건가요?

“2002년, 나이 마흔에 떠났죠. 사실 도피성 유학이었어요. 하하. 그때 소위 ‘386 세대’가 새로운 정치 운동을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 단체도 만들고 저도 참여했죠. 실제 ‘386 세대’가 정치권에 많이 들어가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렇다고 정치가 바뀌진 않더군요. 그래서 다 정리하고 별 생각 없이 떠난 거였는데 11년을 살았죠.”

미국 럿거스 대학에서 그는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엔 올드 도미니언 대학에서 조교수로 시민 저널리즘을 가르쳤다.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딸도 낳았다.

“현실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니 공부를 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그 때 제 화두는 ‘우리가 새 세상의 불쏘시개가 되겠다며 학생운동도 하고 정치권에도 들어갔는데 왜 바뀌지 않을까’였거든요. 그래서 대학원에 갔고 ‘인터넷 시대에 변화된 소통 환경이 인간의 정치적 상상력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사람 사이의 관계는 또 어떻게 다르게 만들까’, ‘사람들이 사회에 참여하는 방식은 또 어떻게 달라지게 하나’ 이런 걸 공부했죠.”

그는 미국에 갈 때는 ‘내가 다시는 오나 봐라’하는 심정이었지만, 정작 미국에서 머무는 내내 레이더는 한국을 향해 있었다고 했다. 2013년 돌연 보따리를 싸서 한국에 돌아온 것은 어쩌면 떠날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귀국하자 마자 시민단체 ‘희망제작소’에서 일을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인터뷰 연재도 맡게 됐으니 쉼 없이 달린 셈이다.

-122명의 마음에 들어갔다 와보니 달라진 게 있던가요?

“제 나이가 되면 인간관계가 편협해지기 쉬워요. 이른바 학벌, 지위, 거주지에 따라 익숙한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죠. 그런데 인터뷰를 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신선한 자극이었죠.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마음을 열고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연 퇴화할 테니까요. 그런 면에서 인터뷰 덕분에 노화가 더디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2주에 한번은 정기적으로 정신적인 운동을 하게 만들어줬으니까요. (웃음)”

이 대목에서 얘기가 쭉쭉 뻗어나갔다.

“변화에 마음을 열지 않으면서 자기를 ‘진보’라고 생각하는 걸 저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 진보냐, 보수냐 하는 건 이념에 따른 낙인이 아니고 삶의 태도에 달렸으니까요. 제가 그런 말 자주 하거든요. ‘진보가 무슨 와인이냐?’ (웃음) 소위 진보(진영)에서도 ‘나는 87년산 진보인데, (20)18년산 진보 얘네를 이해할 수 없어. 우리 때는 안 그랬거든. 얘들은 조직도 없고 리더도 없고 이념도 없잖아’ 하는 사람들 많거든요. 세상이 변화했으니 자기의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그런 측면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좋은 자극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건, 저한테는 노화를 지연시키는 방부제였죠.”

◇직장맘들 눈물 콧물 뺀 ‘연차보장 수다회’
‘와글’이 만든 시민입법 온라인 플랫폼 ‘국회톡톡’에서 제안돼 입법에 성공한 첫 사례는 ‘신입사원ㆍ복직자 연차보장법’(근로기준법 개정안)이다. 지난해 2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법 개정을 바라는 시민과 매칭 의원으로 참여한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와글 제공

-‘열림’을 연재하는 와중에 ‘와글’을 설립했죠. 찾아보니까 ‘와글와글한 군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실험을 한다’는 취지였군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게 하는 정치, 그런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얘기죠. ‘열림’과 같은 맥락이기도 해요. 예전에 조직이라는 건 위계적인 질서에 리더십은 중앙집중적이었지만 지금은 달라졌죠. 이미 ‘촛불항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했고요. 이걸 구현해보고 싶었죠. ‘와글’이 하는 일은, 구체적으로는 시민 참여 플랫폼이나 온라인 도구를 기획하는 것과 청년세대 리더를 발굴하고 키우는 것이죠. 저까지 5명이 고정 멤버예요. 모두 2030세대죠.”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한다면요.

“시민이 직접 입법에 참여하는 ‘국회톡톡(toktok.io)’ 사이트를 2016년에 만들었어요. 시민이 손 쉽게 입법 제안을 하고, 이에 동의하는 국회의원들을 연결해서 실제 발의될 수 있도록 하는 ‘시민 입법’ 플랫폼이에요.”

‘국회톡톡’은 일단 접속해보면 한 눈에 원리를 알 수 있다. 시민이 이유와 함께 입법 제안을 하면, ‘참여하기’를 눌러 동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고, 동의한 시민이 1,000명을 돌파하면 법안 관련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초대 이메일이 발송된다. 의원의 답변에 따라 얼굴 옆에 ‘참여’, ‘불참’, ‘무응답’ 배지가 붙는다. ‘국회톡톡’으로 입법까지 이어진 첫 사례는 신입사원에게도 입사 1년 차에 연차휴가를 보장해주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다. 한 시민의 제안에 1,789명이 동의했고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법안을 발의해 국회를 통과했다.

“의원과 매칭이 되면 시민 참여자들과 간담회를 해요. 그래서 ‘연차보장 수다회’라는 간담회를 잡았는데, 청년들이 주로 올 줄 알았어요. 신입사원 문제니까요. 그런데 간담회 때 실제로 보니 청년은 3분의 1정도고, 나머지가 ‘직장맘’이더라고요. 임신하고 아이를 낳느라 경력이 단절됐다가 다시 신입사원으로 취업하는 여성들이 많잖아요. 아마 엄마들이라면 알 텐데, 아이를 떼어 놓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 그 즈음에 아이가 유난히 자주 아파요. 그러니 갑자기 연차를 써야 될 경우가 많은데 법상 1년 차 신입사원에게는 보장이 안됐던 거죠. 문제라고 생각했던 사안을 누군가 제안하니까, 엄마들이 우르르 참여를 한 거예요. 간담회에 온 엄마들이 자신들이 겪은 일을 얘기하면서 나도 울고 너도 울고 엄청난 공감대가 만들어졌죠. 한정애 의원도 함께 울컥해서 간담회 마치고 뒤풀이까지 하고 돌아갔어요.”

-의원에게도, 시민에게도 의미 있는 경험이었겠군요.

“맞아요. 법이라는 게 어마어마하게 어려워서 법대를 나오거나, 시민단체 전문가이거나, 국회의원이 아니면 입도 뻥긋 못하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 문제로 가장 피해를 많이 받는 당사자들의 주장이 입법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걸 체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의원이나 정당 관계자들 만나서 이런 얘기를 하면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아요. 무슨 새로 나온 물건 팔러 나온 외판원을 대하는 느낌이죠. ‘당신이 정치를 몰라서 그러는 거야’라는 반응도 있고요.”

-디지털이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정치가 가장 바뀌지 않는 듯 해요.

“가장 후진적이죠. 전 세계적으로 봐도 디지털 기술의 세례를 가장 더디게 받는 영역이 정치예요. 정치는 디지털화하면 그간 의사결정 과정을 컨트롤 해왔던 이들이 기득권을 시민에게 나눠줘야 하니, 싫어하는 거죠. 디지털 기기의 일상화가 사람들의 정치적 상상력도 변화 시키는데 말이죠. 광장의 변화에 정치, 제도가 조응해야 하는데 여전히 옛날 문법을 쓰면 엄청난 불일치가 생길 거예요.”

-대의 민주주의는 생명을 다한 걸까요?

“대의 민주주의가 사라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두 가지 변화가 필요해요. 지금 선출직은 선출될 때만 선출직이잖아요? 다음 선출까지 민의를 제대로 대의할 수 있도록 아래로부터 당론을 모으고 시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있어야 해요. 다른 한편으로는 선거법을 개혁해서 제도 보완을 해야 하고요. 결국 국회가 법 개정으로 해야 할 일인데 중이 제 머리를 깎지 못하고 있으니, 일부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가미해서 견제를 할 필요가 있죠. ‘국회의원 소환제’ 같은 제도만 있어도 지금 보다는 더 긴장하지 않을까요?”

-국회를 보면 너무나 굳건해서 변화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막막해요. 새로운 패러다임을 체화한 청년세대는 아직 정치 세력이 되지 않은 상태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그래서 잠이 안 와요. (웃음)”

-그런데 왜 시작하셨어요.

“하하. 그러게요. 내가 될 일을 하고 있는 건가, 진짜… 제 주변엔 기성 정당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만나면 그래요. ‘될 일을 해라’, ‘나잇값을 해라’, ‘나이 오십이 넘어 애들이랑 무슨 일을 벌이냐’, ‘우리 땐 그렇게 안컸다’… 어제, 그제도 들었던 얘기죠.”

-청년세대를 그렇게 여긴다는 건가요? 설마 현역 국회의원도 그 중에 있나요.

“노코멘트 할래요. 하하.”

그는 쓴 웃음으로 답을 대신 했다.

-시민의 자발적인 정치 참여도 중요할 텐데, 우리나라는 당비 내는 당원의 수조차 많지 않죠. 한마디로 정치에 돈을 쓰려 하지 않는 것도 걸림돌 아닐까요.

“당원들도 뭐가 있어야 돈 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팟캐스트나 인터넷 방송을 보고 돈 보내는 사람들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아요. 없는 살림에 낸다고요. 내가 당비를 낸다는 건 애정의 표현이자 격려, 공감과 연대의 표시인데 정당들이 그런 이들의 의견에 따라서 뭔가를 결정하는 일이 몇 번이나 될까요? 정당에서 ‘오픈 프라이머리’를 도입해서 일반 시민도 투표에 참여하게 하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죠. 그런데 스페인의 ‘포데모스’(온라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대안정당)도 당원, 비당원 구분 없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게 해요. 시식 먼저 하게 한 뒤에 ‘맛있으면 사세요’ 하는 거죠. 이것과 특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선입장 후 구매 가능’ 중에 뭐가 낫겠어요. 심지어 주요 정당이 ‘온라인 입당’을 가능하도록 한 게 얼마 안된 일이에요. 그거 아세요? 그런데 ‘온라인 탈당’은 안 되는 거. 하하.”

-맞아요. 그래서 ‘팩스 탈당’을 하죠.

“위선적인 시민참여 정치가 아니라면, ‘온라인 입당’만 가능하게 할 게 아니라 그에 맞게 정당이 바뀌어야죠. 디지털 마인드를 탑재한 열린 정당이라면, 누가 왜 어떻게 비례대표 5번을 받았는지, 심사위원단은 누구였고 누가 어떤 후보한테 몇 점을 줬고, 왜 낮은 점수를 줬는지 궁금하면 물어 볼 수도 있고, 이런 걸 투명하게 공개해야지요. 그런데 우리는 과정 중에 공개 되는 게 없죠. 이런 정치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지속 가능한 정당을 고민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거죠. 지속 가능한 의석 말고!”

◇“청년이 살 미래, 그들이 직접 설계하게 해야”
그가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은 정치의 벽 앞에 선 건, 그만큼 정치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영권 기자

-그런 정당을 새로 만드는 게 더 빠를까요?

“기존 정당이 계속 바뀌지 않고 시대 변화에 뒤떨어진다면, 그런 움직임이 생길 수도 있겠죠. 그런 임계점까지 갈 것인지, 그 이전에 선도적으로 변화하는 정당이 생길 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정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결국은 세대 교체가 답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직은 모든 분야에 주도권을 쥔 세대가 4050 장년층이죠. 그들이 세상의 변화에 기여한 바가 있지만, 특정 시점을 지나면서부터는 변화의 걸림돌이 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까 말한 ‘87년산 진보’는 아직 자기들만큼 훌륭한 세대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청년세대를 끊임없이 질타하죠. 저의 개인적 고민이 그거예요. 다 제 친구들이고 저도 그 세대인데, 저는 그들과 시각 차이가 있는 거죠. 아직은 후대 세대의 도전이 그만큼 강하지 않은 측면도 있고요. 저는 그 세대에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세대를 위해서 뒤에서 물도 날라주고 접의 의자도 들고 따라다니는 역할을 하고 싶은 거죠.”

-6ㆍ13 지방선거 때 성과가 좀 있었나요?

“‘와글’의 청년 리더 캠프 참가자 28명 중에 7명이 출마해서 3명이 당선됐죠. 떨어졌지만 득표율이 15%를 넘어서 선거비용을 보전 받은 친구도 있고요. 기본적으로 비당파적인 조직이기 때문에 소속 정당이 어디든, 있든 없든 각 분야에서 활동력이 뛰어나고 의지가 있는 청년 리더가 대상이에요. 일회성 교육이 아니라 이후에도 그들이 연대하면서 정치적인 상상력을 펼 수 있도록 네트워킹의 기반을 제공하려고 해요.”

-청년 리더를 키우는 일을 시작한 이유는 뭔가요?

“새로운 당원을 재생산하거나 키우는 정당이 별로 없어요. 거칠게 말하면 다 ‘노인네 정당’으로 가고 있는 거죠. 정당이 청년층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거죠. 그러니 저한테도 ‘쓸 데 없는 일을 한다’고 나무라는 거고요. 괜찮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할 거니까. 다만 좀 외로울 뿐. (웃음)”

-정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인 거죠.

“그럼요. 시대 변화에 맞게 제도권이 화답을 해서 변화하는 게 진보지요. ‘87년산 진보’들은 계속 자기들은 건강한 청년의 몸과 마음을 가졌다고 착각하면서 노화하고 있죠. 동맥경화 온 지는 오래됐는데. 이런 얘기하면 무슨 정치 혐오주의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람들이 들어가고 싶은 정당을 만들어 달라는 게 제 요지입니다. (웃음)”

-3년 남짓 ‘와글’과 ‘열림’을 병행했는데, 서로 통하는 게 있던가요?

“세상은 영웅호걸에 의해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것. 장삼이사, 이름없는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 바뀌는 것이란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몇 명의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는 것뿐이죠. 우리 각자의 빛나는 부분을 어떻게 더 돋보이게 응원할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이 어떻게 연쇄반응 할 수 있게 할까. 그게 ‘열림’을 쓸 때나 ‘와글’을 할 때 갖는 마인드예요. 특히 청년세대는 그간 너무 많은 기회를 박탈 당했죠. 기대 여명이 더 긴 세대가 이 세상을 더 오래 살 거잖아요. 그러니 그들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어떻게 설계할지 고민하게 하고, 미래를 결정하는 데 참여하게 하는 건 중요한 일이죠.”

이런 게 정치의 본질이다. 정치는 개인과 개인의 연대에서 시작하니까. ‘사람’에 집중하는 그가, 진짜 새 정치를 여는 일에 도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던 거다.

-지금까지 살면서 지켜온 삶의 도가 뭔가요?

“아이고. 제가 살면서 뭘 그렇게 일관되게 지켜왔겠어요. 하하. 저는 할 줄 아는 게 말하고 글 쓰는 것 밖에 없는 인간이에요. 그런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언필칭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집단이라면, 공개적으로 한 말과 쓴 글은 약속이라고 여기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기게 됐다면 다시 공개적으로 이유를 밝히고 사과를 해야지요. 지킬 자신이 없는 말은 하지 말고, 했으면 지켜야 하고! 말이나 글과 다르지 않게 살아야 하는 것, 그러지 않을 거면 그냥 입 닫고 쓰지 않는 게 세상 도와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이번 인터뷰는 ‘도발적인 발상’이었다. 인터뷰어가 인터뷰어를 인터뷰한다는.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간 내가 많은 이를 괴롭혔다는 생각이 든다”며 까르르 웃었다. “그래서들 그렇게 (영혼이) 털렸다고들 한 거였군요. 저도 털린 기분이에요.”

‘열림’을 말할 때 그의 눈빛은 몽글거렸지만, ‘와글’에선 이글거렸다. 어떤 대목에서는 한숨도 쉬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꽉 찬 에너지를 느꼈다. 아마 ‘열림’으로 만난 122명에게서 확인한 사람이란 희망이 ‘와글’의 동력이 됐을 것이다. 정치를 바꾼다는 것만큼 허망한 구호가 없다. 한반도의 3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안철수의 새 정치’란 우스갯말이 달리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새 정치에선 희망의 실마리가 보였다면 섣부른 판단일까.

고영권 기자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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