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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식물성의 순례

입력
2018.09.19 18:3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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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들에 가을빛이 완연하다. 여름 내 초록빛으로 무성했던 나무나 풀들이 벌써 적갈색을 띠면서 칙칙한 빛으로 변하는 것들도 있구나. 아침에 김장할 채소를 파종한 텃밭으로 나갔는데, 밭 두렁에 내 키만큼 훌쩍 자란 큰엉겅퀴도 보랏빛 꽃들이 거의 시들고, 우듬지의 씨방엔 목화송이처럼 핀 백색 관모가 씨앗들을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때가 되자 씨앗들이 어미그루와의 작별을 시작한 것. 서늘한 바람결에 저마다 흰 깃을 달고 하늘하늘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씨앗들을 보니 얼마나 후련하던지! 나는 그 아름다운 여정에 ‘식물성의 순례’라 명명했다.

늦은 아침밥을 먹고 쉬는데, 우체부 아저씨가 조간 신문을 대문간에 획 던지고 간다. 신문을 읽다 보니 교회 세습 얘기가 눈길을 끈다.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식물의 씨앗들은 어미그루와의 작별을 저리 선선히 하는데, 인간은 그것이 어려운 모양이다. 식물만 아니라 새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도 자기가 낳은 새끼들과 작별할 때 보면 얼마나 매정하게 연을 끊어 버리던가. 그런 아름다운 작별이야말로 조물주가 우주를 운영해 가는 방식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 땅의 많은 종교인들은 영계(靈界)를 향하지 않고 물질계를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로는 영적 삶을 떠벌리면서도 그 행위는 자본의 악령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이런 존재의 이중성은 그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슬람 성자이며 시인인 젤라루딘 루미는 말했다. “물질계에 더 많이 깨어 있을수록 영계에 더 많이 잠들어 있다. 우리 영혼이 신에게 잠들어 있을 때, 다른 깨어 있음이 거룩한 은총의 문을 닫아버린다.”

성직의 대물림뿐 아니라 교회 재산의 대물림도 감행하는 철면피! 오, 혈연은 쇠심줄보다 질기고 질긴 모양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자기 아버지가 있는 카필라 성으로 돌아와 밥을 빌어먹는 거지 행각을 했다. 아버지 정반왕(淨飯王)이 아들 붓다를 찾아가 걸식을 못하게 막으며 “석가족에는 거지란 없다. 왜 밥을 빌어 집안 망신을 시키고 다니느냐”고 꾸짖었다. 그 말을 들은 붓다는 “나는 석가족이 아닙니다”라고 대꾸했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혈연에도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

예수는 또 어떤가. 그는 가나의 혼인잔치 자리에서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불렀다. 속인의 눈으로 보면 불효자의 언사가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혈연’에 매이지 않고 하늘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음을 보여 주는 것.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 12: 50).

기독교든 불교든 그 가르침의 원조에 해당하는 스승들은 그 어떤 연(緣)에서도 자유롭기를 가르치건만 왜 제도 종교의 리더라는 이들은 세상 인연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어부 출신의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본래 물고기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 중에서도 가장 조악한 수성(獸性)에 속한다.”(조셉 캠벨, ‘신화의 힘’) 그래서 예수는 어부 출신 제자들에게 그런 수성으로부터 인간을 건져 올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수성’이란 곧 물질의 탐욕에 얽매임을 가리킨다. 거룩한 옷(聖衣)을 걸치고 있지만 그 존재는 여전히 세속적 욕망의 덫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나는 종교의 종(宗)자도 모르지만 우리 삶의 마루에 우뚝 서서 참 자유의 본을 보여 주는 식물을 눈여겨보자는 것. 엉겅퀴 같은 식물성의 순례를 경외의 마음으로 우러러보자는 것. 황폐해진 우리 삶의 멋진 스승인, 말없음으로 가르치는 스승의 말에 쫑끗 귀를 기울여보자는 것.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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