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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웃기는 업적’이 존중받는 사회

입력
2018.09.18 19: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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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환절기가 되면 비염 환자들의 손가락은 바빠진다. ‘막힌 코 후비기’는 고통스럽지만 참기 힘든 유혹이다. 보통 사람들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코파기의 즐거움’이란 책을 쓴 롤랜드 플리켓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취미이자 오락거리로 ‘코파기’를 언급했으니, 코를 후벼 쾌락을 얻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된 행동일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코파기’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 특히 청소년들의 ‘코파기’는 잘못된 습관으로 여겨져 강한 제재가 뒤따른다. ‘강박적 코파기(Rhinotillexomania)’에 대한 우려도 있다. 그렇다면 ‘코파기’가 문제 행동일까. 이를 연구한 학자들이 있다.

2001년 인도의 국립 정신건강 신경과학 연구소의 치타란잔 안드라데 박사와 B.S. 스리하리 박사는 20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코파기’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학생들의 절반은 하루 4회 이상 코를 판다고 대답했고, 하루 20회 이상 코파기에 ‘심취’하는 학생도 7%나 됐다. 한번도 코를 판 적이 없는 학생은 4% 미만이었고, 코파기는 모든 사회계층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결과가 나왔다. 두 사람은 “일반적인 수준의 코파기는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행위”라 결론 내렸고, 이 연구는 그 해 ‘이그노벨상’ 공중 보건 부문 상을 받았다.

한심하고 쓸데 없는 연구 같지만 이그노벨상의 역대 수상자들은 이런 엉뚱하고 발칙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긴 사람들이다. 이 상은 미국 하버드대의 과학 잡지 ‘기발한 연구 연보(AIR)’가 1991년부터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상의 이름((Ig Nobel Prize)은 ‘품위 없는’을 뜻하는 ‘ignoble’과 노벨을 합성해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4일 열린 올해 시상식에선 직장 상사에게 복수하고 싶을 때 부두 인형을 찌르면 스트레스 감소 효과가 있다는 연구(경제학상), 롤러코스터를 타면 신장 결석을 제거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연구(의학상) 등이 상을 받았다.

역대 수상 목록을 보면 더 황당하다. 지독한 방귀 냄새를 정화하는 기능성 속옷, 메아리 효과를 활용해 회의나 토론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수다쟁이를 제어하는 ‘스피치재머’, 위급 상황에서 접으면 방독면 역할을 하는 브래지어, 단체 사진을 찍을 때 눈 감은 사람이 한 명도 없게 하려면 최소한 몇 장을 찍어야 하는지 정리한 수학 이론….

우리사회의 엄숙주의가 많이 허물어지긴 했지만, 이런 아이템을 연구하겠다고 하면 조롱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연구라면 모름지기 ‘국가 경제와 민생에 기여하고, 인류 공영에 이바지해야 한다’며 거창한 명분과 품위를 들먹이고, 의미와 가치를 따지고 드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과학 연구 뿐만 아니라 각종 정책, 법안, 제도들도 비슷하다. 발칙한 유머를 포용하는 여유, 하찮아 보이지만 꼭 필요한 ‘디테일’이 수용될 공간은 부족하다.

이그노벨상을 만든 마크 에이브러햄스는 “세상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는 것을 즐기지만 이그노벨상은 혼돈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획기적인 연구는 처음 나왔을 때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게 대부분이어서 가치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1999년 이그노벨상(환경 부문)을 받은 권혁호 코오롱 부장이 개발한 ‘문지르면 향기 나는 양복’은 혁신 사례로 거론된다. 회식 등 술자리에서 밴 고약한 냄새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이 양복은 당시만 해도 재미있고 기발한 제품에 불과했으나 아이디어는 산업의 한 분야로 성장했다. 탈취ㆍ방향제 등 국내 향기 제품 시장 규모는 2조5,000억원으로 커졌고, 옷의 냄새와 먼지를 제거해주는 의류관리기는 가전기업의 주요 제품군이 됐다.

창의성은 재미와 호기심에서 나오고, 혁신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재미 허용 지수’는 여전히 낮은 것 같다. 혁신을 통해 세상이 진보하길 바란다면 얼굴의 인상을 풀고, 재미를 좀 찾아보자.

한준규 디지털콘텐츠부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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