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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연재소설, 「생산성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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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연재소설, 「생산성박사」

입력
2018.09.18 14:06
수정
2018.09.19 17:54
0 0

길브레스 저

오일로(吳一路) 역

<소개의 말="">
원명 《CHEAPER BY THE DOZEN》―타(打, 다-스)로는 싸진다―으로 널리 알려진 이 소설은 미국에서도 유명한 ‘길브레스(F. B. GILBRETH; 1868~1924)’의 가정생활을 중심으로 재미있는 여러 모를 재지(才智)와 유-모아(*humor)가 충만한 필치로 그의 장남(E. B. GILBRETH JR)과 차녀(E RNESTINE GILBRETHCAREY)가 공저한 것으로서, 미국에서 1948년 BEST SELLERS의 하나로 되었으며 이미 수 개 국어로 번역되고 있다. 자녀가 12명이란 아해복(兒孩福) 터진 가정부터가 미소를 자아나게 하는데, 이러한 가정에 아버지의 전공인 능률이 도입되어 가기까지 유-모아가 발생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이 소설에서 은은히 흐르는 가정의 애정과 미국인 특유의 기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인 길브레스 부처(夫妻)는 능률기사였으며 과학적 관리법의 권위자였고 동작연구(MOTION STUDY)의 창시자로서 미세동작연구(MICROMOTION STUDY) 궤적모사(*軌跡模寫; CYCLEGRAPH) 실체사진기 투시판(透視板)(PENETRATING SCREEN) 운동모형(MOTION MODEL) 등과 같은 연구 설비 및 방법을 사용하였다. 길브레스는 1924년에 사망하였는데, 기간(其間) 각국의 초빙(招聘)으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소설은 능률에 관계 있는 분이나 교육가는 물론이려니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유-모아로 차 있어 각국에서 인기를 자아내고 있는 특색있는 소설이라 하겠는데 여기서는 다소 요약 연재하는 바이다.(역자)

※월간 《기업경영》은 한국생산성본부가 1958년부터 발간한 저널입니다. ‘생산성박사’는 《기업경영》 창간호(1958년 1월)부터 게재된 소설이며, 당시에는 ‘능률박사’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습니다. 이 소설을 독자에게 옮기면서 옛 글맛을 살리고자 띄어쓰기와 쉼표를 빼고는 원문 그대로 살렸습니다. 다만 지금의 표기와 크게 차이가 나는 단어나 외래어의 경우는 괄호 안에 *으로 구분해 올바른 표기나 영문을 같이 실었습니다.

1. 면도와 휘파람

아버지는 턱이 크고 키가 후리후리한 몸집으로 ‘하-바-드·후-바-(*Herbert Hoover; 전 미 대통령)과 같은 높다란 칼라-를 달고 있었다. 아무리 외누리(*에누리)해서 보아도 야윈 체격은 아니었다. 서른 살 고개를 넘으면서는 이미 체중은 90키로를 넘었고 그후에도 계속 비대해졌기 때문에 정거장 수화물용 거울의 신세를 지면서 체중을 달아봐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 아내를 자랑하고 가족과 자기의 전문(專門)을 능히 자랑할 만한 입신출세한 신사로서의 자신은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세 사람에 나누어 주어도 충분할 만한 벅찬 심장과 세파를 당당히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과 풍채를 갖추고 있었다. 독일의 ‘싸이스(*Zeiss)’ 공장이나 미국의 ‘피아스·아로-’(*Pierre Arrow)와 같은 대 공장에 가서 ‘생산기간을 4분의 1까지 단축시켜 보겠다.’고 어깨를 재는 그러한 분이셨다. 사실 그렇게 해치우기고 하였다.

우리는 열두 형제이다. 왜 그렇게 자식 부자가 되었느냐구? 이것 역시 어머니와 같이 하는 일은 무슨 일이었든지 잘 해낼 수 있다는 아버지다운 소신의 한 가지 표시라 하겠다.

아버지는 자기주장은 무슨 일이 있든 기어코 해치웠다. 그래서 그런지 어디서부터가 생산성 사무소고 어디까지가 가정생활인지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졍이었다. 사무실에는 언제나 코훌쩍이들이 우글거렸고 용무로 여행을 갈 때라도 두서넛은 다리고(*데리고) 나서기가 일쑤였다. 때로는 열두 명 한 무데기(*무더기)로 다리고 나서는 수도 많았다.

아닌 게 아니라 ‘뉴-자-시’(*New Jersey) 주 ‘몽크레아’(*Montclair)의 우리집은 과학적 관리법과 소용없는 동작을 없애는 학교―아버지와 어머니가 명명한 동작연구의 학교―와도 흡사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접시를 씻고 있는 장면을 영화로 촬영하며 ‘얼마나 소용없는 동작을 없앨 수 있는가?’ ‘얼마나 빨리 일을 마칠 수 있는가?’를 연구했다. 뒷문에 뺑기(*paint)를 칠하거나 앞뜰 풀뽑기를 하는 등속(等屬)의 임시 일감은 저액입찰제(低額入札制)에 의해서 보수(報酬)를 지불했다. 용돈을 더 타고 싶은 아이는 제각기 품삯 희망액을 써서 비밀 입찰을 하는 격이다. 물론 계약은 최저의 입찰자에게 떨어지게 마련이다.

목욕탕에는 공정표(工程表)와 작업표가 붙어 있었다. 아버지는 될 수 있는 대로 일찍부터 글 쓰는 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글씨를 쓸 수 있게 되면은 아침마다 양추(*양치)를 하고 목욕을 마친 후 머리를 빗고 도표에 싸인(서명)을 해야 된다. 밤에는 밤대로 각자 체중을 재어서 ‘그라프(graph)에 써 넣은 후에야 숙제를 하고 손과 낯을 씻고 이를 딲은 다음에는 또 다시 도표에 서명해야 된다.

만사가 군대식이었다. 그러나 아이 하나라도 학교에 보내게 되는 날에는 양친에게는 보통일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열두 아이들이니까 말이다. 정신병원 같이 뒤범벅되어서는 야단이기에 다소 군대식으로 하는 것도 부득이한 일이었다. 물론 아이들 중에는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도표에 싸인만 슬쩍하는 아이도 때로는 있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아버지는 손도 그만큼 빨랐다. 그 덕분에 슬쩍슬쩍 눈을 속이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항상 생산성 전문가였다.‘조끼(상의)’의 단추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 잠그지 않고 아래서부터 위로 끼었다. 즉 아래서 위로 걸면 3초로 잠글 수 있지마는 위에서 아래로 잠그게 되면 7초가 걸린다는 계산이었다. 또 아버지는 면도질하는 시간이 17초 더 단축될 수 있다고 해서 얼굴에 비누칠을 하는데 부랏슈(*brush)를 한꺼번에 두 개를 쓰는 일까지도 있었다. 한때는 면도 두 개를 가지고 수염을 깎아 보려고 무척 애를 써 봤으나 이것만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면 40초를 아낄 수 있는데 오늘 아침에는 목에 붕대를 감는데 2분이란 손해를 봤군…” 하면서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아버지를 괴롭힌 것은 면도날도 상처가 난 목도 아니고 공연히 허비하게 된 2분이란 시간이었다.

너무나 애들이 많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이들을(*아이들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고 있다고 동네사람들은 말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아이들을 마끼고(*맡기고) 강연회에 갔었을 때 일어난 이야기를 아버지는 곧잘 하셨다. 어머니가 돌아와서 “별 일 없었우?” 하고 물으니까

“저기 있는 저 아이만 속을 썩히드군(*썩이더군). 그 애도 볼기짝을 두드려 주니까 얌전해지든데…” 하는 것이 아버지 대답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무슨 일을 말하더라도 당황하는 일이 없는 침착한 분이다.

“여보 저 애는 우리집 애가 아니에요. 이웃집 앤 줄도 모르세요?”

2. 자가용차 피아스·아로-

아버지가 자동차를 한 대 샀다. 그 자동차는 집에서 산 첫째 자동차이기도 하고 그때만 하여도 자동차가 그다지 많지 않을 때였다. 그러니 자동차를 샀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복잡한 기계의 설계를 바꾸고 그 기계를 다루는 동작을 감축시키는 것이 전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집 자동차의 기계구조에 대해서는 깜깜무소식이었다.

정직하게 말해서 아버지는 운전은 전혀 엉터리었다. 그래도 달리는 것만은 참으로 솜씨가 좋았다. 이 관록에는 우리들은 모두 믿었으나 유독 어머니가 제일 무서워했다. 갓난애 둘을 보듬고 운전대의 아버지 자리 옆에 앉아서 아버지 팔목에 매달리다가 눈을 감다가 기도를 드리다가 하면서 새파랗게 질린다. 자동차는 우측에 운전대가 있기 때문에 운전대의 어머니와 갓난이 왼쪽에 앉은 사람은 감시 역할을 하고

“전진 오라이” 때는 그렇게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

“손을 내라.”

아버지가 고함친다.

어머니와 갓난이를 빼놓고는 전원의 손―열하나의 손―이 자동차 양편에서 선뜻 나온다.

“왼쪽에서 자동차! 아빠.”

감시원의 하나가 소리를 지른다.

“바른쪽에서 두 대.” “뒤에서 오토바이.”

“알았어 알아.”

아버지는 대답은 하지만 실상 모르고 있다.

“너희들은 아버지를 믿지 않니.”

전기 크락숀(*Klaxon)과 나팔 두 개를 한꺼번에 울리고 속력을 내고 핸들을 쥐고 “로-드·훗그(*road hook), 로-드·훗그(도로 한복판을 달리며 교통방해를 하는 자동차를 로-드·훗그라 함)라고 외치면서 그 뒤에 담배까지 피운다는 가지각색 재주를 모조리 한꺼번에 해치웠다. 이런 일을 해내는 것도 동작연구 전문가로서의 능력의 덕택인 것이다.

아버지는 낡은 자가용차에 가족들을 태우고 외출하려 할 때는 ‘집합’ 휘파람을 부는 것이었다. 모두 다 모이며는“희망자는 몇 명이지?”

하고 묻는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외교사령(*外交辭令)에 불과하다. 아버지 가는 곳에는 언제든지 모두 딸아다니기(*따라다니기) 때문에 희망자를 묻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니까….

아버지의 운전은 위험천만이긴 하였지만 결사적인 질주와 모든 다른 차까지 우뚝 서서 바라보는 극적 장면 매력이 다분이 있었다.

‘드라이브’는 양친(*兩親)하고 함께 지낼 수 있는 좋은 촨스(*chance)이기도 하였다. 운이 좋으면 운전대에 양친과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아이들 수는 굉장히 많고 양친의 수는 지극히 적으니 희망대로 양친 옆에 갈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한 시간 사이를 두고 순번을 정해서 운전대에 양친 옆에 앉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한 번씩 나가게 될 때는 온 집안이 그야말로 야단법석이다. 마치 선거날 전의 신문사나 작전단행 전날의 참모본부 같은 대소동이다.

어머니는 한편 심리학자였다. 아버지가 하는 방식보다도 어머니의 독특한 방식이 가족들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수가 많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어머니는 엄격한 단속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자동차를 타고 나가자고 제안하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제안하지 않는 이유도 있다. 어머니는 방마다 돌아다니면서 아이들 싸움을 말리고 눈물 콧물을 닦아주고 단추도 잠궈주었다.

“엄마 오빠가 내 속옷을 감췄어. 찾아줘 빨리 응.”

“엄마 무릎 위에 앉아도 좋아? 난 한 번도 엄마 무릎에 못 앉아봤어-”

이런 법석이었다.

이렇게들 수다를 떤 끝에 앞뜰에 계집애들은 위에 덥옷(*덧옷) 사내아이들은 린넬(*linière)의 수-쯔(*suits) 제각기 입고 모이면 어머니는 으레히 이름을 쭉 부르기 시작한다.

우리들은 그러나 ‘출석을 부르는 것’은 시간과 동작의 낭비라고 툴툴거렸다. 우리집에서는 시간과 동작을 낭비하는 것처럼 큰 죄악은 없다고 모두들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차에서 내려서 어머니와 갓난애 둘을 보듬고 운전대에 들어선다. 그리고 특히 얌전하게 행동한 아이를 골라서 운전대에 앉히고 왼쪽 편을 감시하게 한다.

3. 다-스(打)로는 싸진다

자동차 뚜껑을 걷어치우고 달릴 때는 남들이 볼 때는 참으로 가관이었던 모양이다. 우리 일행이 시내를 통과할 때는 곡마단 일행이 지나가는 데 모양 야단스러웠다. 그래도 아버지는 이것을 좋아하였다. 자동차 속도를 한 시간 5마일로 내리고 괜히 훨신(*훨씬) 앞서가는 자동차를 보고도 비키라고 경적을 울렸다. 이 경적은 아버지의 풍금 악기인 것이다.

“저것 보게. 어른을 빼놓고도 열하나는 틀림없네.”

누군지 큰소리로 떠드는 품이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그러면

“여보게 앞자리에도 갓난애가 있는 것은 못봐는(*못봤는) 모양이군.”

하고 아버지는 고함치며 응수한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안 들리는 것처럼 앞만 보고 있다. 통행인들은 이 골목 저 골목에서 구경이야 하고 튀어나오고 아이들은 또 이것이 재미있는지 서로 아버지 어깨에 올라서랴고 조른다.

“그렇게 많은 더벅머리들을 키워서 대체 뭣을 할 셈인가? 이 사람아.”

“얘들말인가?”

아버지는 큰 목소리로 대답한다.

“이것쯤이야 문제 아니네. 집에 남겨둔 애들도 보이고 싶네 그려.”

네거리에서 교통신호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수군거리다가는 으레 이런 질문이 튀어나온다.

“이 많은 애들을 다 먹이고 있우? 정말!”

아버지는 잠시 생각한 끝에 천천히 뒤로 틈을 뻗히면서 그 당장에서 생각해낸 것처럼 온 거리에 다 들리라고 이렇게 외친다.

“암 그렇구 말구. 애들도 다-스(打)로 치면 싸지는 법일세.”

이 대답이 떨어지자 모두들 박수갈채를 보낸다. 아닌 게 아니라 아버지는 만장의 박수갈채를 받으리라고 이 대답을 생각해낸 것인데 번번히 예상대로 들어맞았다.

아버지는 연극을 꾸미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이 박수갈채의 고비가 교통신호가 바뀔 때 마다 들어가게 시간을 재곤 한다. 구경꾼들이 와글와글 웃고 있는 사이에 우리 차는 하-얀 연기를 남기고 떠나간다. 배꼽을 걷어쥐고 웃어대는 군중을 뒤에 남겨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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