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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누구랑 무얼해도...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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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누구랑 무얼해도... 좋지 아니한가

입력
2018.09.22 04:40
수정
2018.09.2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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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추석(秋夕)’은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다. 본디 일년 중 가장 밝은 달을 즐기라고 있는 날이었다. 그런데 시대마다, 지역마다, 생업에 따라 추석의 의미가 더해지고 덜해졌다. 조선시대를 지나오면서 유교의 영향으로 차례와 성묘가 등장했다. 산업사회에 들어서는 도시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꼭 만나야 하는 공식 휴일이 됐다. 절차는 한결 간략해졌다고 하나 추석이 드리운 그늘은 여전하다. 며느리의 눈물을 머금은 명절음식, 친척간에 주고 받는 불편한 대화, 전쟁이라 불리는 귀성길 등은 아직 반복되고 있다.

세태가 빠르게 바뀌면서 추석 연휴를 색다른 휴일로 보내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싹트고 있다. 친지들과 모여 고스톱을 하는 등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다 좀더 의미 있고 알찬 추석을 보내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명절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추석 새 풍속도를 소개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신(新)가족의 탄생

주부 황주연(35)씨는 10년 전부터 매년 명절에 특별한 가족과 만난다. 미술을 전공한 황씨가 보육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후원을 약속한 아이들이다. 여섯 살이었던 민우(가명)와 찬영(가명)이는 내년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황씨는 “명절에 아무도 찾지 않는 시설에 아이들이 있는 게 마음에 걸려 우리 집에 같이 가자고 했다”고 말했다. 결혼한 첫 해였던 황씨는 명절에 시댁에 가야 했다. 고민 끝에 시댁에 양해를 구하고 아이들을 데려가기로 했다. 시부모는 흔쾌히 받아줬다. 그렇게 10년 전 새로운 가족이 탄생했다.

처음에는 힘들었다. 고작 여섯 살인 아이 둘은 손이 많이 갔다. 먹이고 재우고 노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족들도 선뜻 동의는 했지만 막상 뭘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황씨는 낯선 환경에 마음을 닫고 있는 아이들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황씨는 “내 마음이 편하자고 아이들을 불편하게 한 건 아닌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라며 “어린 아이들이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어서 정말 가슴이 무너졌었다”고 했다.

명절 밤에는 하루 종일 긴장한 아이를 꼭 안고 울면서 잠이 든 적도 있다. 그렇게 몇 번의 힘겨운 명절이 지나갔다. 황씨는 “힘들다고 관두면 아이들이 영영 마음을 닫을 것 같았다”며 “좋건 싫건 간에 가족이 되려면 거쳐야 할 시간이려니 하고 버텼다”고 했다. 황씨와 가족의 노력에 아이들도 마음을 활짝 열었다. 두 아이는 일년 중 생일과 어린이날 다음으로 명절을 가장 좋아하게 됐다. 아이들은 집에서 황씨의 딸과 놀아주거나 음식 하는 것을 도와주거나, 영화를 보면서 편하게 시간을 보낸다.

가족들도 달라졌다. 시어머니가 먼저 ‘애들 언제 오니’, ‘누가 데리고 올 거니’, ‘이번 추석에 애들이랑 뭐 할 거 없니’라며 챙기고, 시동생 내외는 ‘이번에 애들 용돈 얼마 줘야 되지’라며 고민한다.

올해 설 명절에 경기 용인 황주연씨 집을 찾은 민우와 찬영이가 사촌동생들과 함께 세배를 하고 있다. 황주연씨 제공.
올해 설 명절에 경기 용인 황주연씨 집을 찾은 민우와 찬영이가 사촌동생들과 함께 세배를 하고 있다. 황주연씨 제공.

난감할 때도 있다. 두 아이를 만났을 때 나이가 된 황씨의 딸이 ‘오빠들은 왜 엄마아빠가 안 올까?’, ‘오빠들은 왜 집에 다른 아이들과 같이 살아?’ 등을 묻곤 한다. 황씨는 “아이들이 혹여 상처를 받을까 걱정이 됐는데, 정작 딸이 ‘오빠들은 엄마아빠 보고 싶을 테니깐, 엄마가 더 잘해줘야지’라고 해 마음이 한결 놓였다”고 했다. 두 아이가 사춘기가 오면서 가족을 부담스러워할까도 걱정이었는데 아이들은 황씨에게 “이모, 나는 이모 집에 와서 TV만 봐도 너무 좋은 걸요”라며 “별 걱정을 다한다”고 했단다. 황씨는 “아이들 얘기를 들으니깐 나만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며 “때가 되면 (명절을 함께 보낼지를)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할 때까지 함께 할 생각”이라고 했다. 추석의 의미를 묻자 황씨가 답했다. “일년에 딱 두 번 있는데 가족끼리 같이 보내야죠. 가족이 꼭 피를 나눈 가족이어야 하는 건 아니고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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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만 만나야 명절이 즐겁나요

비슷한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끼리 추석을 함께하기도 한다. 웹툰 ‘서늘한여름밤의 내가 느낀 심리학썰’의 작가 이서현(30)씨는 올해 추석에 시댁이나 친정에 가지 않는다. 남편이랑 여행을 가거나 혼자 있을 생각도 없다.

이씨는 13일 자신의 블로그에 ‘제사 가지 말고 나랑 놀자’라는 글을 올렸다. 참여조건은 세 가지. 제사를 마다해야 하고, 여성이어야 하고, 추석에 시간이 있어야 한다. 15명을 모집했는데 순식간에 마감됐다. 이들은 추석 당일인 24일 만나 서울 시내 한 식당에서 맛난 음식을 먹으며 신나게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다.

이씨는 2년 전 결혼하면서부터 명절에 시댁을 가지 않고 있다. 그는 “며느리가 가면 으레 음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안 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며 “음식을 해도 불편하고, 안 해도 불편한데 왜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안 간다”고 했다. 시부모와 남편은 이씨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있다. 이씨는 “추석 명절을 즐겁게 보내려면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며 “굉장히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일인데,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예전에는 시댁을 안 가는 대신 친정엘 갔다. 이씨는 “친정에 가니 장녀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며 “시댁과 친정을 떠나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면 개개인이 존중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친정 행마저 거부했다. 결국 올해 설에는 혼자 보냈다. 홀로 보낸 명절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씨는 “명절이 다 함께 즐겨야 하는 축제여야 하는데, 혼자 있으니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올 추석을 앞두고 묘안을 떠올렸다. 같은 고민을 하면서 비슷한 가치를 가진 여성을 만나보자고 생각한 것. 이씨는 “맛난 음식을 먹고, 참여하는 구성원이 즐거운 그런 축제가 명절이 아닌가”라며 “구성원이 가족일 수도 있겠지만 친구일 수도 있고, 1년간 자주 보고 싶은 사람일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그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고, 또 존중 받는다면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해 명절을 민족 대축제답게 즐겨보자”고 제안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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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대가 떠나는, 꿀 같은 휴가

명절 연휴에 여행을 떠나는 모습은 이제 제법 자리 잡아가는 새 풍속. 혼자서 또는 친구끼리, 아니면 가족 몇몇이 자동차나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3대가 길을 나서기는 쉽지 않은 일. 하지만 마음의 문을 여는 어르신들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직장인 정필용(38)씨는 올해 추석에 부모님과 남동생 부부, 자녀와 함께 속초 여행을 떠난다. 3대가 처음 떠나는 가족 여행이다. 정씨네는 일년에 제사만 여섯 차례, 설과 추석 명절까지 합하면 8번의 차례를 지낸다. 정씨는 “과거에는 가족들이 서로 잘 못 만났지만, 요즘에는 연락도 자주 하고 주말에 같이 모여 식사도 해 굳이 명절이 아니어도 가족을 만날 일이 많아졌다”며 “오히려 평소에 못간 여행을 가보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명절 여행을 결정하기까지 수 차례 시행착오를 거쳤다. 지난해 추석부터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 가짓수를 대폭 줄여봤다. 변화가 생겼다. 맏며느리였던 정씨의 어머니는 시집온 후 41년간 명절에 허리 한번 못 펴고 줄곧 음식을 해왔지만, 음식 수를 줄인 것만으로도 한결 편안해했다. 정씨의 아내도 부담감을 덜었다. 정씨는 “전통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족들도 즐거워야 하는 것 같다”며 “일을 줄이니 가족끼리 앉아서 얘기하거나 영화를 볼 수 있어 오히려 가족 유대가 더 돈독해진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정필용(맨 왼쪽)씨 부모님과 아내, 딸까지 올해 추석에는 3대가 강원 속초로 여행을 간다. 정필용씨 제공.
정필용(맨 왼쪽)씨 부모님과 아내, 딸까지 올해 추석에는 3대가 강원 속초로 여행을 간다. 정필용씨 제공.

올해는 추석 연휴 전에 차례를 미리 지내고 여행을 간다. 장소는 설악산을 좋아하는 부모님을 고려해 속초로 정했다. 정씨는 “명절의 취지는 존중하되 방식을 조금 바꿔보고 있다”며 “평소에 가지 못했던 가족 여행을 같이 가게 돼 너무 설레고, 추석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정씨는 다음에는 처가와도 여행을 갈 생각이다.

◇취미 활동하고 맛집 탐방

추석을 평소에 못했던 취미활동을 마음껏 하면서 보내는 이들도 있다. 직장인 박현광(27)씨는 올해 추석에 달리기 동호회 회원들과 서울 여의도 일대 12㎞를 달릴 생각이다. 차도 없고 한적해 평소보다 훨씬 달리기가 편하단다. 박씨는 “지난해만 해도 추석 연휴 내내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과 시간을 보냈지만 올해엔 당일에만 다녀오고 나머지는 회사 다니면서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일찍 올라오면서 귀성 전쟁에서도 해방됐다. 그는 “명절에 차표 구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는데, 당일 아침에 갔다 올라오는 표는 많아서 차표 구하기가 편했다”고 했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쉬울 법도 한데 그는 “명절에 가족들 얼굴을 보는 건 좋지만 연휴 내내 같이 있어야 하는 건 부담스럽다”며 “연휴가 길어진 만큼 가족과 보내는 시간과 나만의 시간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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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김진주(22)씨는 이번 추석에 친구들과 평소에 사람이 많아서, 시간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가지 못했던 맛집을 찾아 나선다. 서울에서 같이 사는 부모님은 대전 친척집에 가지만 김씨는 혼자 남아 친한 친구 두 명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는 “일년에 딱 두 번 의례적으로 만나는 친척들과 어색하게 앉아서 불편한 질문을 나누는 게 명절은 아니다”고 했다. ‘남자친구 생겼니?’, ‘졸업하면 뭐 할 거니?’ 등을 마음에 걸리는 질문으로 꼽았다. 김씨는 “추석처럼 긴 연휴가 없으면 취업준비나 학업 등으로 바쁜 친구들을 볼 기회가 자주 없고, 그런 친구들과 편안하게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으며 수다를 떨 수 있어서 추석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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