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테리 이글턴 ‘유물론’

조금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임하는 영국 철학자 테리 이글턴. 갈마바람 제공

유물론이라고? 어휴, 대체 언제적 ‘사유’(사적유물론) ‘변유’(변증법적 유물론) 놀음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필요는 없다. 번뜩이는 재치와 필력의 소유자인 테리 이글턴이 말하는 유물론이란, 이를테면 일요일 오전 11시면 전국 각지에서 암송되는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 끝부분을 다시 읽어보자.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기독교는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이다.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믿는” 종교니까. 이 유물론을 뭐라 부를까, 고심하다 ‘신체적(Somatic)’, 혹은 인간학적(Anthropological)’ 유물론이라 이름 붙였다.

그렇기에 신체적 유물론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합리성을 동물적 합리성이라 가르친다.” 인간들은 두뇌의 발달, 이성의 등장을 뭔가 차별적인, 멋진 것으로 묘사하지만 “우리는 육욕(肉慾)을 지녔기에 인지능력을 지녔다.” 두뇌와 이성이 왜 나왔겠나. 먹고 살기 위함이다. “성찬식에서 신은 일상적인 물질인 빵과 포도주 안에, 곧 세속적인 일인 씹기와 소화하기 안에 임한다.” 고로 “구원이란 숭배와 예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굶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보살피는 것에 대한 문제다.” 기독교 저격에 온 힘을 기울이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를 두고 ‘교리서 한번 안 읽어본 멍청이’라 내갈겨버리는 이글턴다운 얘기다.

신체적 유물론이란 “고귀한 것이 저속한 것에 기반을 둔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이 말은 ‘저속한 것’을 인간 공통 기반으로 삼는다는 얘기다. 쉽다. 아무리 우아한 척 해도 우린 먹고 자고 싸는 존재다. 물론, 이 말을 직접 입에 안 담는 게 더 우아하긴 하겠지만.

유물론
테리 이글턴 지음ㆍ전대호 옮김
갈매나무 발행ㆍ224쪽ㆍ1만4,000원

문제는 이를 부정하려는 이들이다. 제 아무리 영혼이 고상한 관념론자라 해도 3일만 굶기면 곧바로 유물론자가 될 테니 관념론은 일단 제외. 걸림돌은 유물론 내부에 있다. 바로 미셸 푸코를 비롯, 질 들뢰즈니 알랭 바디우니 하는 프랑스 철학자들이다.

이글턴은 이들을 ‘신유물론자’라 부르면서 마음껏 조롱한다. 스스로는 유물론자라 주장하지만, 실은 관념론자에 불과하다는 게 이글턴의 주장이다. “실재, 사건, 욕망, 정치적인 것, 기호적인 것, 윤리적 결정, 혁명적 활동” 같은 ‘고상한 것’들을 내세워서 “합의, 관습, 도덕성, 일상의 제도” 같은 ‘저속한 것’을 계속 부정하기 때문이다. 기호, 흐름, 코드, 탈주 같은 단어란 바로 그런 의미다.

신유물론은 “요새 인기가 없는 역사적 유물론을 대체”하기 위해 등장했으나 “역사적 유물론과 달리 착취적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처한 운명에 그다지 관심 없는 듯 하다”고 일갈해뒀다. 이를 일러 “프랑스 특유의 악덕”이라고 해뒀다. 1990년대부터 한국을 휩쓸었던 그 멋진 프랑스 철학이란 게 실은 그런 악덕이었다니, 어째 관심이 동하지 않는가.

조태성 기자 amoraf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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