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다산독본] <28> 이중 행보

'추국일기' 속 1801년 2월 18일자 이승훈 공초 기록. 이승훈은 1789년 11월 북경에 보낸 편지가 자신이 쓴 게 아니라 정약용이 자신의 이름을 도용해서 보냈다고 진술했다. 당시 신성모독죄 해결이 주요 이슈였다.
비만 오는 세상 길

다산은 1788년 3월의 출사 결심 이후, 5월 1일에는 2년 전인 1786년 5월 11일에 갑작스레 세상을 뜬 왕세자 사망의 책임을 물을 것을 요청하는 연명 상소에 이름을 얹었다. 탈상이 코앞에 있었다. 2년 전 약방과 의원은 홍역으로 인한 왕세자의 열기를 다스리지 못했다. 1786년 5월 30일과 6월 21일 당시에도 다산은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에 이름을 올렸었다. 당시 약방 제조, 즉 방약방의 책임자는 서명선이었다.

서명선이 누군가? 1780년 홍국영 몰락 직후 채제공을 직격했던 소론의 영수였다. 상소는 약방 의원보다 서명선을 겨냥한 정치적 성격이 짙었다. 1786년 6월 11일 정조는 오히려 서명선에게 “지난 번 상소가 번갈아 나온 것은 그들이 기회를 틈타 흔들어보려는 꾀임을 훤히 볼 수 있었다”고 말하며 잇단 처벌 요구를 묵살했다. 이것이 1788년 5월 1일에 죽은 세자의 탈상을 앞두고 다시 쟁점화되었고, 다산은 이 상소에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출사 결심의 첫 행보를 알렸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교회 내부의 사정도 골치 아팠다. 다산은 교회 일보랴, 과거 공부하랴 분주했지만 어느 하나 신통한 것은 없었다. 이 때 지은 시 ‘고우행(苦雨行)’은 괴로운 장맛비에 심사를 얹어 답답한 교착 상황을 토로했다.

괴로운 비, 괴로운 비, 그치잖코 내리네

불씨도 다 꺼져서 동네 사람 근심 겹다.

아궁이에 물이 나서 깊이가 한 자인데

어린 아들 오더니만 나뭇잎 배 띄우누나.

네 애비도 너만 할 땐 똑 그렇게 놀았나니

고개 들어 화내려다 외려 절로 부끄럽다.

내 이제 책 베끼며 문밖을 안 나섬은

기운 빠진 때문이지 공부 잘됨 아니로다.

苦雨苦雨雨不休(고우고우우불휴)

煙火欲絶巷人愁(연화욕절항인수)

竈門水生深一尺(조문수생심일척)

穉子還來汎芥舟(치자환래범개주)

迺翁當年所不免(내옹당년소불면)

擧頭欲嗔還自羞(거두욕진환자수)

我今鈔書不出戶(아금초서불출호)

良由氣衰非學優(양유기쇠비학우)

세상 길을 나서려 해도 비 때문에 못 나간다. 아궁이에 물이 한 자나 들어차서 밥도 짓지 못한다. 할 수 없이 틀어박혀 책을 베껴 쓰는 초서(鈔書) 작업을 한다. 공부가 잘 되어서가 아니라,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다. 멋모르고 나뭇잎 배를 띄우며 신난 어린 아들을 지켜보는 눈길만 안쓰럽다.

계산촌으로 이승훈을 찾아가다

다산은 광중본 ‘자찬묘지명’에서 자기 입으로 “정미년(1787) 이후 4, 5년간 서학에 자못 마음을 기울였다(丁未以後四五年, 頗傾心焉)”고 했다. 1788년 당시는 물론 이후로도 3, 4년간은 천주교의 핵심부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했다는 뜻이다.

1786년 가성직제도 시행 이후 천주교의 교세는 폭발적 성장을 보였다. 초기 이벽과 이승훈, 다산 형제와 권일신 등 몇 사람에 의해 출발했던 것이 1789년에는 1,000명을 넘어섰다. 1787년 봄 10명의 신부 중 한 사람이 ‘성교절요(聖敎切要)’ 등의 교리서를 공부하다가 주교에 의해 사제 서품을 받지 않고는 미사와 성사 집전을 할 수 없고, 한다면 이는 독성죄(瀆聖罪), 즉 신성모독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 그에 의해 이 문제가 난동과 반교의 집행부 모임에서 정식으로 상정되었고, 이후 이들은 대단히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성사 집행이 즉각 중단되었다. 미사도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미사 폐지는 신자들에게 영적 양식을 빼앗고, 구원의 희망을 꺾는 일이라 하여 당분간 계속하기로 했다. 성사가 중단되면서 교우들이 동요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이 문제에 대해 중국 교회에 권위 있는 해석을 청해야만 했다. 하지만 보낼 인편과 비용 마련이 쉽지 않았다. 집행부 내부의 의견도 갈리면서 혼선을 빚었다.

이 같은 고민의 와중에 1788년 9월 초, 다산은 천주교와 과거 준비에서 도망치듯 문암산장으로 갔다. 해마다 가을걷이를 위해 문암에 머물곤 했으니 특별하달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때 다산의 행보는 조금 이상했다. 다산은 문암에 도착한 직후, 당시 계산촌(鷄山村)에 머물고 있던 자형 이승훈을 만나러 갔다. 계산촌은 문암산장에서 멀지 않은 양주 사기막골 인근 굴운역(窟雲驛) 근처에 있었다.

숨지 말고 나갑시다

당시 이승훈은 어째서 서울 아닌 이곳에 머물고 있었고, 다산은 왜 그를 찾아갔을까? 이승훈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다산은 시 한 수를 남겼다. 제목은 ‘남일원으로부터 배를 타고 문암장으로 돌아오며(自南一源乘舟還門巖莊)’란 작품이다. 남일원은 다산의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에서 벽계(檗溪) 인근에 있던 1,000그루의 밤나무로 이름났던 마을이라고 적었던 곳이다. 시의 부제가 ‘이때 계산으로 이형을 찾아갔다(時于雞山訪李兄)’이다. 이승훈이 1801년 천주교 문제로 처형당했기 때문에, 다산은 문집에서 이승훈을 말할 때 그의 이름을 적지 않고 꼭 이형이라고만 썼다.

맑은 밤 술상 앞서 술잔 나누며

만년에 함께 살자 약속을 했지.

단풍나무 아래서 채찍 들고서

흰 구름 언저리로 노를 젓누나.

모용(茅容)의 뜻 지닌 줄은 진작 알았고

이필(李泌)의 어짊 갖춤 마침내 아네.

산림은 하늘조차 아끼는 바라

어이해 티끌 인연 사절하겠소?

對飮酬淸夜(대음수청야)

連棲約晩年(연서약만년)

拂鞭紅樹裏(불편홍수리)

移櫂白雲邊(이도백운변)

已識茅容志(이식모용지)

終知李泌賢(종지이필현)

山林天所惜(산림천소석)

那得謝塵緣(나득사진연)

둘은 모처럼 만나 술잔을 나눴고, 늙어서는 이곳에서 이웃이 되어 살자고 다짐했다. 지금은 할 일이 많으니 아니라는 뜻이다. 5, 6구의 의미는 이렇다. 모용은 동한(東漢) 때 효자였고 뒤늦게 글을 배워 덕망 높은 선비가 되었다. 이필은 당나라 때 네 임금을 섬겨 재상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모용을 말했으니 이승훈이 이때 부모를 모시기 위해 그곳에 내려갔던 듯 하고, 다산은 그가 이필처럼 끝내 과거를 보아 여러 임금을 섬기는 어진 신하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7, 8구는 묘한 말이다. 숨어사는 산림처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티끌 세상의 인연을 끊을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고 했다. 당시 이승훈은 아예 속세의 인연을 끊고 완전히 은거할 작정으로 계산촌에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출사를 결심한 자신의 의지를 밝히며 그의 뜻을 돌리려 했던 듯하다.

여기서 생각이 조금 복잡해진다. 당시 이승훈은 가성직 제도 하의 천주교단에서 간판 격인 인물이었는데, 교회 일로 동분서주해도 시원찮을 그가 어쩐 일로 산골에 처박혀서 아예 바깥 세상으로 안 나갈 작정까지 하게 되었던가? 교단 내부에 알지 못할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사실 이승훈의 처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가 많았다. 그는 일이 생기면 공개적으로 시문까지 지어가며 배교를 선언했고, 얼마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슬며시 돌아오곤 했다. 없는 말을 만들거나 다른 사람을 끌고 들어가는 행동도 서슴지 않아 신뢰를 점차 잃었다. 이때 다산은 갈등을 빚고 교회를 벗어나있던 자형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갔던 것은 아닐까? 교회는 유일하게 중국 천주당에서 공식적으로 영세를 받았던 이승훈의 아우라가 필요했을 것이다.

북경 특사 파견과 위조 편지

조선 천주교회는 1789년과 1790년 당면한 독성죄 자체 고발로 봉착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북경 교회에 두 차례에 걸쳐 특사를 파견했다. 1789년 10월 윤유일(尹有一)은 조선 교회가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서한을 옷 속에 누벼서 거액의 뒷돈을 주고 동지사 일행에 장사꾼으로 끼어들어 떠났다. 옷 속에는 이승훈의 편지와, 애초에 문제를 제기했던 유항검으로 추정되는 이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 편지들은 한문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현재 로마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번역문이 보존되어 있다. 편지에서 이승훈은 당시 조선 교회가 처한 심각한 고민을 토로하고, 자신들이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청원을 썼다.

1789년 이승훈이 북경에 보낸 편지의 프랑스어 번역 사본. 로마 교황청에 소장되어 있다. 이승훈은 이 편지가 자신이 쓰지 않았고 정약용이 자기 이름을 빌려서 쓴 것이라고 되풀이 해 말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그런데 훗날 1801년 2월 18일, 이승훈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을 적에 이상한 말을 했다. ‘추국일기(推鞫日記)’ 속에 들어있는 이승훈의 공초 기록을 보면, 이승훈은 “1790년 무렵 정약용이 권일신의 제자 윤유일과 함께 제 이름을 빌려 북경의 서양인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심지어 1795년에도 그의 심부름꾼인 지홍(池洪)과 윤유일을 시켜 천주교의 전법기물(傳法器物)을 가져오게 해서 정약용의 집에 보관하였노라고 고발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당시 이 편지 위조 사실을 자신이 고발하려 하자, 정약용이 “조정에서도 이미 모두 환히 아는 사실이니 제발 고발하지 말아 달라”고 자신에게 애걸했다는 말도 보탰다. 심문관은 네가 주고받은 편지가 분명한데 어찌 정약용에게 떠넘기느냐고 다그치자, 이승훈은 다시 “정약용이 서찰을 위조해서 제게 책임을 전가했지만, 저는 실로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라고 한번 더 발뺌했다. “정약용 삼형제가 제 이름을 빌려서 서양인과 교통하는 섬돌로 삼았다”고도 말했다. 처남 매부 사이였던 이들은 막판에 이르러서는 거의 막장 드라마 수준까지 갔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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