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 역외탈세 혐의자 93명 세무조사 착수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역외탈세 사례. 국세청 제공
지능적 역외탈세 혐의
중견기업 사주ㆍ연예인 등
국세청, 93명 세무조사 착수

제조업체 대표 A씨는 조세회피처인 버진아일랜드(BVI)에 수년 전 서류상 회사(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 이후 이 페이퍼컴퍼니는 홍콩에 법인 B사를 만들었다. A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국내 제조업체가 제품을 수출할 때마다 중간에 B사를 끼워 넣었다. B사에 제품을 정상가격보다 15~20% 저렴하게 넘기고, B사는 이를 해외 현지법인에 정상가로 재판매하는 방식으로 ‘통행세’를 챙긴 것이다. B사가 이 같은 통행세 구조로 확보한 수백억대 자금은 고스란히 A씨의 해외 비자금이 됐다. 국세청은 최근 A씨를 조세포탈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법인세 수백억원을 추징했다.

중소 연예기획사 대표 B씨는 소속 가수의 해외콘서트 개최를 위해 현지 에이전트 업체에 관련 업무를 맡겼다. 그는 해외 콘서트로 벌어들인 수익금 70억원을 국내로 반입하지 않고, 이를 홍콩 차명계좌(페이퍼컴퍼니 명의)에 은닉했다. 국세청은 B씨를 조세포탈 혐의로 고발하고 법인세 90억원을 추징했다.

국세청은 12일 이처럼 해외에 소득이나 재산을 은닉한 개인과 법인 93명에 대해 세무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37명)과 올해 5월(39명)에 이어 세 번째 역외탈세 세무조사다. 지금까지 역외탈세 조사는 대기업ㆍ대재산가 위주였지만 이번에는 중견기업 사주일가와 고소득 전문직까지 대상이 확대됐다. 김명준 국세청 조사국장은 “조사 대상에는 의사ㆍ교수 등 사회 지도층이 다수 포함됐다”며 “펀드매니저와 연예인도 조사 대상의 일부”라고 말했다. 국내범죄와 연관된 역외탈세 건은 검찰 산하 ‘해외불법재산환수 합동조사단’과 공조해 조사할 계획이다.

이번 조사 대상은 조세회피처를 자금세탁 경유지로 활용하거나, 해외 현지법인과의 변칙거래를 통해 해외 비자금을 조성하는 ‘신종’ 역외탈세 사례다. 과거에는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자금을 묻어두거나, 국내재산을 해외로 반출해 은닉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 설립→직원 채용 등 정상기업 위장→자ㆍ손자회사 설립’ 등 거래구조를 다단계로 설계해 탈세자금을 은닉하는 수법이 등장하고 있다. 김명준 국장은 “해외 현지법인과의 거래가격을 조작하거나 형식적인 인수ㆍ합병(M&A)을 시도해 국내 법인 자금을 해외로 빼돌리는 탈세수법도 많이 동원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국세청은 조세회피처에 차명으로 미신고 현지법인을 설립한 후 여기서 직접 제품을 생산해 미국 등 해외거래처에 판매하고 그 대금을 조세회피처상 페이퍼컴퍼니로 빼돌려 은닉한 제조업체 대표 D씨를 조사하고 있다. 차명으로 설립한 해외법인(위장계열사)에 적자가 쌓이자 자신이 대주주인 국내 제조업체에 이를 고가에 인수하도록 지시하고, 매매대금을 해외에 은닉한 제조업체 사주 E씨도 적발됐다. 국세청은 자녀가 유학 중인 국가에 현지법인을 설립 후 해당 법인에 현지 시장조사 용역비 명목으로 매달 수억원을 보내고, 이를 자녀의 호화 유학생활 ‘종잣돈’으로 활용한 기업인도 조사 중이다.

국세청의 역외탈세 조사는 갈수록 속도를 낼 전망이다. 상대국 거주자의 금융계좌ㆍ금융소득정보를 상호 교환하는 ‘국가간 금융정보 자동교환협정(MCAA)’ 대상국이 지난해 46개국에서 올해 78개국, 내년 98개국으로 대폭 늘어난다. 특히 ‘비밀금고’로 유명한 스위스에 자금을 은닉한 국내 개인ㆍ법인의 정보가 곧 과세당국에 접수될 예정이다. 또 역외탈세 ‘천국’이라 불리는 홍콩과의 조세조약이 체결돼 내년부터 관련 정보가 국내에 들어올 전망이다.

한편 국세청은 이날 지난해 12월과 올해 5월 두 차례에 걸쳐 역외탈세 혐의자 76명을 조사해 5,408억원을 추징한 사실도 공개했다. 국세청은 지난해 역외탈세에서 역대 최대 규모인 1조3,192억원(233건)을 추징하기도 했다. 세종=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12일 오전 세종시 국세청에서 김명준 조사국장이 국부유출 역외탈세 혐의자 세무조사 착수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국세청은 최근 국제공조 강화에도 신종 역외탈세 수법이 나타나 조세회피처, 역외계좌, 해외현지법인 등을 이용한 역외탈세 혐의가 있는 93명에 대해 세무조사를 착수했다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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