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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마라톤 전투(9.12)

입력
2018.09.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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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90년 오늘 마라톤 전투가 벌어졌다. 사진은 아테네 마라톤로드에 선 전령 페이디피데스의 동상. wikipedia.org
기원전 490년 오늘 마라톤 전투가 벌어졌다. 사진은 아테네 마라톤로드에 선 전령 페이디피데스의 동상. wikipedia.org

페르시아의 정복 황제 다리우스 1세가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의 닫힌 세계를 뒤흔든 첫 전쟁인 마라톤 전투가 B.C 490년 9월 12일 벌어졌다. 다리우스가 복속시킨 에게해 소아시아와 이오니아의 친(親)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반란을 아테네가 지원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결과는 페르시아의 패배였다.

10년 뒤,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압도적 대군을 이끌고 본토를 재침략(2차 전쟁, B.C 480~479), 아테네까지 장악하지만 살라미스와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 잇달아 패배하면서 다시 퇴각했다. 아테네는 2차에 걸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그리스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의해 50년 뒤 패권을 잃었다.

고대 그리스 육군의 주력은 중무장 보병이었다. 지름 1m에 달하는 청동 방패와 청동 갑옷으로 머리부터 정강이까지 감싸, 개인 군장 무게가 30kg이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기동전에 취약해 ‘팔랑크스(Phanlanx)’라 불리는 고슴도치 같은 밀집 병진을 고수하며 단거리를 급습해 적을 제압하는 전술을 구사하곤 했다. 반면 페르시아 육군은 기동력 있는 경기병과 경장보병이 주축이었다. 마라톤 평원은 페르시아가 선택한 전장이었다. 양측 병력 규모도,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페르시아 병력이 아테네-플라타이아 연합군(약 1만1,000명)보다 2배 남짓 많았던 듯하다. 평원을 사이에 두고 9일간 대치하던 페르시아군이 본토 후위 공격을 위해 병력 일부를 바다로 뺀 틈을 타 아테네 군이 전투를 개시, 대승을 거두었다는 게 대강의 전황이다.

마라톤 전투는 10년 뒤 2차 전쟁과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정벌로 이어지며 고대 그리스 말기 꽃피운 동서문화의 융합 즉 헬레니즘 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물론 그 전투는 마라톤의 유래가 된 사연, 즉 한 전령(페이디피데스, Pheidippides)이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의 아고라까지 단숨에 달려 승전보를 알린 뒤 숨졌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하지만 사실은 승전 통보가 아니라 페르시아군의 본토 우회공격 정보를 스파르타에 알려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달린 거였고, 거리도 42km가 아니라 240km였다고 한다. 그의 군장이 상대적으로 가볍긴 했겠지만, 그리스의 여름은 무척 덥고 건조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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