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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들어서 기분 좋은 말

입력
2018.09.07 10:30
수정
2018.09.07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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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웠던 어느 날, 시원한 음료수를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렀다. 창가에 붙은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들어서 기분 좋은 말’ 10가지. ‘너랑 있으면 너무 즐거워’ ‘얼굴 좋아 보여’ ‘널 만난 건 내게 행운이야’ 등 하나같이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말들이었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이왕이면 들어서 기분 좋은 말을 해 주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상대방 기분을 거스르거나 상처 주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하곤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칭찬에 인색하다. 헐뜯고 뒷담화하고 인신공격하는 데는 핏대를 올리지만 정작 칭찬이나 인정에는 말을 아낀다. 문득 프랑스 유학시절이 떠올랐다. 이역만리에서의 7년간 공부를 마무리하는 박사 논문 심사일, 논문발표와 질의응답을 끝내고 밖에서 대기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한참 후 들어갔더니 심사위원 중 맨 가운데에 앉은 지도교수가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 나의 학위 논문에 대해 ‘트레 조노라블르 아벡 펠리시타시옹 아 뤼나니미테’ 평점을 선언했다. ‘매우 존경스럽고 만장일치로 축하한다’는 뜻이다. 순간 논문 쓰면서 고생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눈물이 핑 돌았다. 프랑스의 박사 학위 논문 평점은 문장으로 주어진다. 잘 썼으면 ‘오노라블르(존경스러운)’, 더 잘 썼으면 ‘트레(매우)’가 붙는다. ‘아벡 펠리시타시옹’은 ‘축하와 함께’라는 뜻으로 그보다 한 단계 위임을 나타낸다. 마지막에 ‘아 뤼나니미테(만장일치로)’가 붙으면 최고평점인데, 심사위원 중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받을 수 없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축하와 함께 매우 존경스러움’ 평점은 프랑스 박사 논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그냥 ‘박사 학위 통과’라고 했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의 평점을 받으면 누구든 대단한 업적을 인정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평점을 ‘망시옹(mention)’이라고 한다. ‘언급, 말’이란 뜻이다. 점수로 주기보다는 망시옹으로 등급을 부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시험이 100점 만점이지만 프랑스는 20점 만점이 보통이다. 18점 이상을 받으면 평점은 ‘트레 비엥(매우 잘함)’이고 15~17점이면 ‘비엥(잘함)’이다. 12~14점이면 ‘아세 비엥(제법 잘함)’이고 10~11점은 ‘파사블(보통)’이다. 수치로 점수를 주면 보다 객관적이고 정확해 보이겠지만 그보다는 말로 된 평점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18점이건, 19점, 20점이건 1,2점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트레 비엥’ 평점을 주면 받는 사람은 우쭐해질 것이다.

링컨 대통령은 “40세 이후 얼굴은 모두 자기 책임”이라 말했다. 태어날 때의 얼굴은 부모 책임이라고 하더라도 나이든 이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얼굴은 자기 책임이라는 것이다. 얼굴과 마찬가지로 말도 인격의 일부다. 그 사람 말로 인격을 판단할 수 있다. 말에는 경박함, 오만함, 신중함, 배려심 등 말하는 사람의 인격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배려심이 없는 사람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 말을 하고, 늘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코 남을 칭찬하지 않는다. 기분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주변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일 것이다. 일상에서 내뱉는 퉁명스런 한마디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닫게 할 수 있고,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칭찬하는 말, 듣기 좋은 말 한마디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격려가 될 수 있다. 법륜스님은 진실의 말, 위로의 말은 선물이고, 욕설이나 거짓된 말은 쓰레기와 같다고 했다. ‘들어서 기분 좋은 말을 하는 것’은 돈 안 들고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고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다.

최연구 한국과학창의재단 과학문화협력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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