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임기 지도’부터 ‘출산력’까지 … 개선 안 되는 정부의 젠더 감수성

※ [모슈]는 ‘모아보는 이슈’의 준말로, 한국일보가 한주간 화제가 된 뉴스의 발자취를 짚어보는 기사입니다.

역대 최저치를 찍은 출생률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고 있지만 시대에 맞지 않는 젠더 감수성으로 매번 여론의 역풍을 맞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입만 열면 논란입니다. 역대 최저 출생률을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탁상행정식 대책뿐 아니라 시대와 맞지 않는 젠더 감수성으로 번번이 여성들의 공분만 불러 일으키는 실정입니다.

최근 논란은 보건복지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보건사회연구원입니다. 이 기관은 일명 ‘출산력 조사’를 시행했다가 여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습니다. ‘출산력’이란 단어가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만 인식하는 국가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게 항의의 요지입니다.

보건사회연구원은 ‘출산력’이란 용어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fertility(생식력)’라는 영어 단어의 번역어일뿐”이라고 해명했으나 논란이 끊이지 않자 4일 “‘출산력’이란 단어의 교체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출생률 장려와 관련한 정부의 헛발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 2016년 12월 행자부 ‘가임기’ 지도, “가임기 여성들이 포켓몬 go냐”

2016년 말 행정자치부가 홈페이지에 공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

앞서 논란의 불씨를 지핀 것은 행정자치부의 소위 ‘가임기 지도’입니다. 2016년 12월 29일 행정자치부가 공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는 나오기 무섭게 여론의 역풍을 맞았습니다.

지방자치단체들의 ‘출산율 자율경쟁을 유도한다’는 명목 아래 정리된 이 지도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20~44세 가임기 여성 인구수입니다. 각 지역별로 임신이 가능한 여성의 숫자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분홍색으로 선명도를 조절해 가임기 여성이 어느 지역에 가장 많은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선 “여자가 애 낳는 기계냐” “국가로부터 성희롱을 당한 느낌”이란 항의가 쏟아졌고, 지도가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실제로 포털 사이트엔 성희롱성 댓글이 달리기도 했습니다. 행자부는 공개 하루 만에 서비스를 중단하고 “국민이 오해하신 부분은 송구하다”는 말로 사과를 대신했습니다.

◇ 2017년 2월 보건사회연구원, 저출산은 여성의 고학력 탓?

2017년 2월 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저출산 대책 보고서 중 일부.

‘가임기 지도’ 논란이 채 식기도 전인 2017년 2월 24일. 저출산의 원인을 여성의 고학력 탓으로 돌리는 국책 보고서가 발표됐습니다. 당시 원종욱 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결혼시장 측면에서 살펴본 연령계층별 결혼결정요인 분석’이란 보고서에서 여성의 학력과 소득이 높아지는 현상이 비혼과 만혼으로 이어져 저출산을 심화시킨다며 “불필요한 스펙 쌓기”를 막아야 한다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쓸데 없는 공부할 시간에 아이나 낳으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들끓었습니다.

보고서에는 이 밖에도 “여성의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하향선택결혼이 이뤄지지 않는 사회관습 또는 규범을 바꿀 수 있는 문화적 콘텐츠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며 “단순한 홍보가 아닌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 수준으로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다”는 어이없는 내용도 담겼습니다. 출산을 비롯해 결혼과 연애의 자유까지 국가가 통제할 수 있다는 전근대적 인식에 “모욕적” “국가주의적 발상”이라는 반응이 남녀를 불문하고 쏟아졌습니다. 보고서를 작성한 원 위원은 보직에서 사퇴하고 공개 사과했습니다.

◇ 올 5월 법무부 “낙태는 성관계는 하되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

5월 24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낙태죄 위헌 결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코리아타임스 심현철기자

법무부가 임신중절(낙태) 문제의 원인을 여성의 무책임으로 돌린 적도 있습니다. 낙태죄 위헌여부를 놓고 헌법재판소에서 공개변론이 열린 올 5월 24일, 법무부는 “(낙태하려는 여성은) 성관계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과 출산은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내용이 담긴 의견서를 냈습니다.

여기에는 “합의에 의한 성관계는 응당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란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임신할 걸 알고도 성관계를 했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에 상당한 논란이 일었습니다. 낙태를 하는 여성들의 사정을 무시하고,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여자에게만 전가해 여성을 무책임한 사람으로 몰았다는 것입니다. 법무부는 결국 “낙태에 이르게 되는 여성들의 마음을 신중하게 헤아리지 못했다”고 사과했습니다.

◇ 이번엔 보건복지부, 낙태는 유죄! 답은 정해져 있다

5월 24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낙태죄 위헌 결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모습. 코리아타임스 심현철기자

그러나 낙태를 무작정 막아야 할 것이라고 보는 정부의 인식은 여전합니다. 보건복지부가 진행할 예정으로 알려진 ‘낙태 실태조사 설문지’를 보면 그렇습니다. 설문에는 ‘낙태를 허용하면 우리 사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이 있는데, 이에 대한 답변 문항으로 ①낙태가 늘어날 것이다 ②책임지지 않는 성관계로 성문화가 문란해질 것이다 ③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할 것이다 ④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아질 것이다,를 제시했습니다.

답변 문항의 편향성뿐 아니라 낙태를 성적 문란함의 결과로 보는 구시대적 발상은 또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정부가 이미 낙태죄 존치를 결론으로 내놓고 조사를 진행한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복지부는 “아직 초안일뿐”이라며 수정 계획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성 의제에서 드러난 행정부의 뒤떨어진 의식 수준을 감안할 때 앞으로도 논란을 피해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매번 쏟아지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정부의 젠더 감수성. 과연 나아지기는 할까요?

한국일보 콘텐츠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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