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15>대북공작원 박채서

최후 공작 목표 ‘김정일’을 만난 성공한 공작원
97년 ‘북풍’ 막고, 이명박 정부 ‘대북 비선’ 역할
군인으로, 공작원으로, ‘이중간첩’으로… 생을 돌고 돌아 그는 ‘인간 박채서’로 다시 섰다. 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그를 만났다. 사진은 다중노출 촬영기법으로 찍었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ilbo.com

이 남자에게는 ‘국가’가 신념이고, ‘국익’이 사명이었다. 종교조차 없는 그는, 나라를 위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등치 시킨 삶을 살았다. 국군 장교로, 국군정보사령부 공작관으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공작원으로, ‘이중스파이’로, 흑금성으로, 세상은 그를 달리 불렀지만, 인간 박채서(64)에게는 그 모두가 국익을 수행하는 공직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성공한 공작원이었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 북의 ‘최고 존엄’이자 최후의 공작 목표를 만난 남한의 공작원은 그가 유일하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는 안기부의 윗선이 당시 이회창 신한국당(현 자유한국당)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선거에 북한을 끌어들이려 한 ‘북풍’ 공작을 감지하고 이를 막는 ‘맞공작’을 폈다. 민심이라는 국익을 거스를 수 없다는 판단이 그를 이끌었다. 영혼이 없는 것을 넘어 영혼을 판 공작원이었다면, 자신이 속한 안기부의 국내 정치 공작에 맞서지는 못했을 테다. 고비마다, 적군과 아군 사이의 외줄에 설 수 있게 한 건 ‘국익’이라는 그의 신념이었다.

그런 그를 국가는, 정보기관은, 버렸다. 그가 보고한 기밀을 짜깁기해 만든 문서인 ‘이대성 파일’을 언론에 흘려 사실을 왜곡했다. 국가가 숨겨줘야 할 대북 공작원으로서 신원을 노출했고, 방출시킨 것이다. 이후엔 급기야 ‘이중간첩’으로 몰아 법정에 세웠다. 남북 대치 상황이니 존치돼야 한다고 믿었던 국가보안법이 자신을 폐기하는 도구가 될 줄은 그도 몰랐다.

그래도 억울하지 않다니,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조차 내 신념에 따라 내가 선택한 길의 결과이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아요. 우리(공작원)는 국가나 조직에 배신감을 느끼거나 공작 수행을 후회한다는 말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어요. 다만, 국정원이 비겁한 거지요. 타국도 아니고 우리나라가, 정보기관의 공작원을 규정이 아닌 다른 수단을 동원해 법정에 세웠어요. 이것만큼 치욕이 어디 있나요?”

그도 한때 자신과 가족의 명예를 지키는 방법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한 적이 있다. 자신이 봉직했던 국정원의 수사관들이 2010년 6월 1일 새벽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다. 국정원에 끌려간 뒤부터 그는 곡기를 끊었다. 모진 마음을 먹고 8일을 버텼다. 그때 생을 붙잡은 건 아내의 한 마디였다. “여보, 난 당신 믿어.”

스스로 꺼버리려 했던 책임감의 불씨가 그 말에 다시 살았다. ‘아, 내가 이 사람을 두고 가선 안되겠구나.’

2016년 5월 31일 그는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나왔다.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크기, 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서 6년 형기를 꽉 채우고. 국가는 그를 폐기 처분하려 했으나, 그의 정신은, 신념은 다시 그를 국가 앞에 세웠다.

그리고 이 부활의 수기에는, 기자가 있었다. 22년을 함께 한 이 인연은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를 뛰어 넘어 자신의 양심을 믿게 한 버팀목이었다. 감옥에서 꾹꾹 눌러 쓴 4권의 기록은 김당 UPI뉴스 선임기자의 손을 거쳐 책 ‘공작 1ㆍ2’로, 윤종빈 감독의 각색을 거쳐 영화 ‘공작’으로 탄생했다. 이제는 세상이 그를 대신해 억울해 한다. 이는 그가 곧 국가를, 국정원을 상대로 시작할 재심 청구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직 공작원으로서 억울함도, 후회도 들여 놓지 않는 박채서, 그 신념의 원천은 무엇인가.

◇새벽길 4시간 걸어 청주중 몰래 응시한 ‘독종’
‘흑금성’으로 알려진 박채서씨. 그는 어릴 때부터 의지를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군인의 길을 택하고 결국 국가를 위한 공작원이 된 건 천성에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ilbo.com

-어린 시절부터 ‘해야 하는 것’이 앞서는 성격이었나요?

“그 시절 시골은 다들 그랬듯 우리집도 엄청나게 가난했지요. 그런데도 아버지가 지게를 지거나 손에 삽, 호미를 든 걸 본 적이 없어요. 대신 어머니가 (가장 역할을) 다 하셨죠.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너 공부하지 마라.’ 이해가 안됐어요. 남들 부모는 공부하라고 회초리를 드는데. 그 이유를 (철이 좀더 든) 4학년 때 알았어요. 중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돼서 그렇다는 것을. 그런데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내가 이 시골에서 농사꾼이 된다는 게 억울했죠. 내 꿈은 그게 아니니까.”

-그때 꿈이 있었어요?

“죽어도 농사꾼은 되기 싫은 거였죠. 저는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국어책을 다 외웠어요. 형들 공부하는 걸 어깨 너머로 보고 글을 깨쳤죠.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국민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은 칠판에 ㄱ, ㄴ, ㄷ 적어놓고 가르치는데 저는 뒤에 앉아서 ‘괴도 루팡’, ‘칭기즈칸’, ‘나폴레옹’ 이런 소설이나 위인전 단행본을 읽고 있었으니. (웃음) 국민학교 내내 반장을 하고, 6학년 때는 학생회장도 했죠.”

-그래도 당시 명문이었던 청주중학교에 진학했는데요.

“그때부터 사실 고생이 시작됐죠. 6학년 때 하루는 담임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라고요. 그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봐서 들어가던 시절인데, (충북 청원군의) 우리 학교에서는 청주중에 들어간 예가 없었어요. 저한테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너희 집 형편상 중학교에 가기 어렵다는 걸 알지만, (부모님) 몰래 내가 원서를 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그때 제가 어떻게 한 줄 아세요? 예비소집 전날 집 마당 짚더미 속에 고무신하고 옷을 숨겨놓고 밤새 안 잤어요. 깜빡 잠들면 그걸로 끝이니까. 졸리면 나와서 찬바람 쐬고 들어가고 졸리면 또 나왔다 들어가고. 집에 무슨 라디오고 시계고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닭이 세 번째 울면 그게 새벽 5시예요. 그때를 기다렸다가 몰래 나와서 짚더미 속에서 옷가지를 들고 동구 밖까지 나가 옷을 입고 청주까지 걸어갔지요.”

-얼마나 걸렸나요?

“한 4시간 걸었을 걸요.”

-4시간이요? 그 겨울에 초등학생이… 무슨 생각을 하고서요.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거죠. 청주가 나올 때까지. 제가 가진 한 가닥 희망은 청주 살던 작은 아버지네 사촌 형이었어요. 그 형이 그때 청주중 3학년이었거든요. 학교로 가서 형을 찾았더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형한테 사정 얘기를 하고 함께 손 잡고 운동장에 가서 수험표를 받았죠. 124번.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합격하셨을 때 좋으셨겠네요.

“그런데 그 때는 떨어졌어요.”

-왜요, 공부도 잘 했는데…

“음악, 미술 때문이었어요. 음악 시간엔 풍금에 맞춰서 노래 부르고, 미술 시간엔 들로 나가 그림이나 그렸지 무슨 4분의 3박자가 어떻고, 계이름이 어떻고, 보색 대비가 어떻고… 이런 건 배운 일이 없거든요. 심지어 음악, 미술이 시험 과목인 줄도 몰랐어요. 시험지를 보고 너무 당황했죠. 결국 다 찍었어요. 그러니 떨어졌죠. 정말 선생님들이 원망스럽더라고요.”

그는 이를 악물고 1년을 더 버텼다. 배우지 않은 과목은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버렸다. 그래도 불안하니 시험 전 5, 6개월은 작은 집에 신세를 지며 사촌들에게 묻기도 하고 작은 어머니를 졸라 청주 시내 국민학교에 찾아가 모의고사도 봤단다. 모르는 문제가 거의 없었으니 그때 합격을 예상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린 애한테 그런 강단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그는 웃었다.

“중학교 때는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 때는 자취를 했어요.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죠. 주말에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있으면 어머니가 슬며시 사라져요. 편한 표정으로 돌아오시면 돈을 빌린 것이고,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시면 못 구한 것이니 다시 나가시곤 했죠.”

◇어머니와 약속… 술ㆍ담배 입에 댄 적 없어

그는 예순을 넘긴 지금까지도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 입에 댄 적도 없다. 어머니와 약속 때문이다. 아버지는 술을 달고 살다 위암을 얻어 그가 고1때 세상을 떴다. 아버지의 모습에 질렸던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신 동안 나는 절대 술, 담배를 안 할게요.” 어머니는 올해 아흔 셋이다. 그는 이 약속을 북의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그가 술을 권했을 때도 지켰다. “그게 제 성격인 거죠. 나이 들어 어디서 술 한잔 마시거나 담배 한대 피운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겠어요? 다만 내 의지가 깨지는 거죠. 저는 그게 제일 두려운 사람이고요.”

“그런데 그 아버지가 위암으로 얼마 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나서, 저에게 유언으로 남기신 말씀이 있죠. 고1 밖에 안된 저를 병원으로 부르시더니, “채서야, 어머니를 부탁한다. 그리고 너는 꼭 공부해서 대학에 가라. 그리고 대학 나온 여자 만나 결혼하고, 자식들도 대학에 모두 보내거라”라고 하시더라고요. 우리 형제가 4남 3녀인데, 제가 가운데예요. 위로 형들도 있는데, 저에게 어머니를 책임져달라는 말씀을 하신 거죠.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부모는 자식의 본질을 어쩌면 자식보다도 잘 꿰뚫고 있기에 그랬던 것 같아요. 아무리 제 생각에 아버지 노릇을 못한 분이었어도 말이죠. 커서 결국 형제들 중에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챙겼거든요. 대학에 가라는 당부는, 아버지의 형제들과 달리 당신은 대학을 다니지 못한 게 평생 한이 되었기 때문이었나 봐요.”

-대학에 결국 가셨나요?

“가긴 했는데, 형편상 끝까지 다닐 수가 없었어요. 대학 2학년 때 군에 입대하려고 보니, 졸병으로는 가기가 싫더라고요. 그때 우연히 육군3사관학교 생도 모집 포스터를 봤어요. 장교가 되고 나중에 대학도 갈 수 있다고 하기에 지원했죠. 3사관학교는 (2년제) 초급대학 학력으로 인정했거든요. 들어가보니까, 4년제 정규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군에서도, 사회에서도 (인정 받지 못해)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겠더군요.”

◇3사관학교 출신 ‘벽’ 절감해 전역, 공작원으로
군에서도 그는 목표를 향해 전력을 다하는 ‘독종’이었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ilbo.com

그의 학구열은 군에서도 계속됐다. 대위 시절 OAC(고등군사반) 교육을 받을 때는 대학 편입시험 준비까지 병행해 치렀다. OAC 성적은 진급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동기들은 그에게 ‘OAC에만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너 미쳤느냐’고 했다. 그래도 그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질주했다. 출ㆍ퇴근이 가능한 근처의 대학을 찾아 일어교육과에 응시했다. 그는 면접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편입 시험을 보니 영어와 역사는 다 맞았을 것이고, 국어는 논술이니 채점에 맡기겠습니다. 이렇게 했는데도 떨어지면 이유를 확인하러 오겠습니다.” 교수가 물었다. “일어는 할 수 있나?” “한 글자도 모르지만, 입학만 시켜주시면 군인정신이 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입학할 때 히라가나도 몰랐던 그는 졸업식 때는 일어로 답사를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후엔 장교 영어반 교육과정에도 합격해 이수했다. 비록 육사(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더라도 동기 중에 상위를 달리면 진급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1986년) 10월에 3사관학교 출신 1, 2기 중령들의 첫 대령 진급 심사가 있었어요. 그런데 단 한 명도 진급이 안되더군요. 그때 나도 꿈에서 깼어요. 그래도 나는 소령 진급이 됐지만, 노력해서 (더 이상) 안 되는 거라면 빨리 접어야지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죠. 국방대학원(국제관계)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그는 국방대학원 시절을 두고 “그 때 인생이 바뀌었다”고 표현했다. 이 시기부터 육군대학을 3등으로 졸업해 정보사 공작단 본부로 발령 난 뒤, 1994년 소령으로 전역하고 안기부 공작원으로 채용되기까지 내막을 두고는 구체적인 언급을 삼갔다. ‘흑금성’으로 만들어지는 복잡하고 지난한 시간으로 이해됐다. 영화에서는 이 시기가 군 동료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고, 제대로 갚지 않아 신용불량자가 되는 ‘신분세탁’ 과정으로 그려진다. 그는 “영화이니 극적인 요소를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더욱 치밀한 머리 싸움의 과정이었다”며 “대통령의 친ㆍ인척이나 측근 정치인들과 일을 도모하거나 교류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남한 내 고정간첩이나 북한의 정보기관을 속이기 위한 공작이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와 안기부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군 조직에 불만을 품고 뛰쳐나왔으나 남한 내 권력의 핵심부와도 통하는 엘리트 장교 출신 인사’였다. 1995년 안기부는 이른바 ‘흑금성 공작’을 인가했고 그의 대북 공작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3년 뒤 안기부 수뇌부가 의도적으로 노출(‘이대성 파일’ 사건)하기 전까지는 그도 자신의 공작명을 알지 못했다.

공작원으로서 그의 목표는 북한의 핵개발 첩보수집을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권력 핵심에 침투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실세였던 장성택(김정일의 매제)의 형인 장성우 인민군 중장의 아들 장현철에게 줄을 댔다. 이른바 ‘포대갈이 사업’이 발판이었다. 이후 ‘아자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광고회사의 전무로 위장해 남북 합작 CF 사업을 추진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관심을 갖고 있던 묘향산의 국보급 골동품 매각 문제를 해결하면서 북측의 신뢰를 얻었다. 영화에서도 흥미롭게 그려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시기 김정일 위원장과 ‘30분 면담’도 이뤄진다.

-김정일 위원장도 만나셨죠?

“네, 영화에서는 두 번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론 한 번이에요.”

-직접 만나본 김 위원장은 어땠나요?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사람이었어요. 기본적으로 예술, 문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독한 심성이 없다잖아요. 김 위원장도 그랬죠. 또 당시 면담은 (남북 합작 광고, 골동품 처분 등을) 격려하는 자리이기도 했고.”

-영화에서처럼 김 위원장이 술을 권하기도 했나요?

“그랬죠. 그렇지만 마시지 않았어요. 이미 (그간 교류해온) 북한 고위직에는 (어머니와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내 강한 의지를 말한 상태였고요. 하지만 당시 상대는 (최고 권력자인) 김정일이니 기분 나쁘지 않게 상황을 모면해야 했죠. (김 위원장이 술을 권하니) 옆에 있던 김영룡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이 ‘박 선생이 어머니와 약속 때문에 지금까지 술을 안 합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김 위원장이 (미리 보고를 받았다는 듯) ‘알고 있어’라고 하기에, 제가 그랬어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위원장님이 주는 술은 통일이 되면 받겠습니다.’ 그 말에 김 위원장이 껄껄 웃었지요. ‘호기가 있구만’ 하더니 더 이상 권하지 않더군요.”

◇최면 테스트는 허구… 순발력 덕 위기 넘겨

영화 얘기를 좀더 물었다.

-영화에서는 최면 상태로 북측에서 공작원 여부를 검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화인가요?

“영화는 영화일 뿐이죠. 김영룡 부부장이 밥을 먹다가 갑자기 ‘6ㆍ25는 남침이요, 북침이요’라고 물은 일이 있긴 했어요. 순간적으로 ‘아, 나를 테스트하는 구나’ 싶었죠. 그 때 ‘네?’라고 반문만 해도 안 돼요. 0.5초 만에 의도를 판단하고, 0.5초 만에 답을 해야 하죠. 제가 그랬어요. ‘남침, 북침 뭐가 중요합니까? 6ㆍ25는 한반도 통일 전쟁 아닙니까. 당신들이 한반도를 통일하려고 했으면 남침인 거죠.’ 한 달쯤 지나서 김 부부장이 그러더군요. ‘그 때 박 선생이 북침이라고 했으면 우리하고 끝났시요.’ 북침이라고 했다면 오히려 신뢰하지 않았을 거란 의미인 거예요. 공작원으로 내가 선택된 이유가 결국은 순발력 아니었나 싶어요. 이건 교육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타고 나야 하는 거니까.”

1998년 이른바 ‘이대성 파일’ 건으로 그 해 8월 안기부에서 해고된 뒤에도 노무현ㆍ이명박 정부에서 그는 위기 상황마다 ‘대북 비선’으로서 정부를 측면 지원했다. 그러던 그의 인생에 먹구름이 덮쳤다. 이명박 정권 3년 차인 2010년이다.

-2010년 6월 1일 상황 기억이 나시나요.

“그럼요. 새벽 6시 25분쯤이었을 거예요. 집 사람은 안방 침대에서, 나는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잠이 들었었죠. 누가 초인종을 누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여니까 열댓 명이 밀고 들어오더라고요. 관할 파출소 경찰을 앞세워서 국정원 수사관들이 온 거죠. 뭐라고 떠드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제일 먼저 서재로 가더군요. 바로 찾아가는 걸 보니 몇 번 우리 집에 드나들었구나 싶었죠. 군사교범을 찾더니 바닥에 쭉 깔아놓고는 사진을 찍더라고요.”

50일 간 국정원과 검찰의 수사를 받은 그는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군사교범과 작계 5027-04(북한과 전면전에 대비한 한ㆍ미 군사작전계획)의 일부를 탐지ㆍ수집했다는 죄목이었다. 북 수뇌부에 ‘위장 포섭’돼 안기부의 공작을 수행한 흑색요원이던 그를, 졸지에 진짜 간첩으로 만든 순간이었다. 2011년 10월 대법원은 북한 작전부(현 정찰총국) 공작원의 부탁을 받고 2003년 9월부터 2005년 8월까지 군사기밀을 입수해 넘긴 혐의로 기소된 그에게 징역 6년 형을 확정했다.

“나한테 뒤집어 씌운 혐의는 대부분 2004~2005년에 했던 (대북 관련) 일과 관련됐어요. 더구나 군사교범은 국가 기밀도 아니에요. 결국 작계 5027-04 때문인데, 전혀 범죄요건이 성립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건 한 장군(박채서씨에게 작계 5027-04의 일부 내용을 알려준 것으로 지목된 김모 장군으로, 당시 6군단 참모장)의 인생도 걸린 일(김 전 참모장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이기 때문에 진실을 밝혀야 해요.”

그는 국정원과 검찰이 미리 짜둔 시나리오대로 수사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옥중수기를 바탕으로 김당 기자가 취재와 검증을 거쳐 쓴 ‘공작 1ㆍ2’는 이 사건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과거 정보사 공작관과 안기부 공작원을 지낸 대북 비선으로서 북한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해온 박채서와 현역 육군 소장이 단지 ‘작계 5027-04’와 관련된 대화를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나눈 사실 자체만으로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유죄를 선고 받은 것이다.” 물론 북의 지령을 받은 바도, 작계를 수집ㆍ탐지해 제공한 사실도 없다는 게 박채서씨의 일관된 주장이다.

◇MB정부 3년차,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 ‘충격’
대북사업가로 위장해 북한을 드나들던 안기부 공작원 시절 박채서씨. 북한 고려항공 승무원과 찍은 기념 사진이다. 박채서씨 제공

-국정원이 의도적으로 그랬다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마 1997년부터 2005년에 이르기까지 한 일 때문에 내가 걸리적거렸겠죠. 97년 대선 때 의도적으로 개입하려 한 시도를 막고, 국정원은 하지 못했던 (대북 관련 비선) 일을 한 것에 대한 보복의 성격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나를 구속시킨 데는 더 큰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어요.”

그는 “당시 내가 (더 적극적으로 진실을) 밝히지 않은 건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불순한 의도, 정치적 목적을 갖고 나를 통해 누군가를 저격하려고 했다면, 내가 (대신)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내게 주어진 운명일 테니까요.” 그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97년 대선 때도 나는 순수하게 국가의 이익만 생각했어요.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이 선출돼야 할 선거에, 내ㆍ외부의 불순한 영향력이 개입해 민심을 훼손하는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내 원칙대로 했어요.”

97년 대선 때의 일이란, 당시 안기부의 수뇌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대선이 흘러가도록 개입하려 한 ‘북풍’ 공작을 말한다. 당시 3인의 대선 후보 중 김대중의 당선을 가장 기피했던 북한의 의중을 역이용해 다른 특정 후보의 당선을 꾀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김대중 후보 쪽에 이 같은 움직임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렸고 북풍 공작은 미수로 끝났다.

“그때 고민스러웠죠. (96년부터 알고 지낸) 김당 기자에게 고민을 털어놨어요. 북측이 남한 선거를 좌지우지 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게 우리의 공통적인 생각이었어요. 결정적으로 그의 이 말이 내가 결심하는 데 영향을 미쳤어요.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됩니다.’”

◇6년간 독방 수감… 생각 안 해야 살 수 있었다

그 양심이란, 그가 지금까지 지키고자 했던 국익이었다. 이것이 결국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권영해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이듬해 3월 권영해 부장과 이대성 해외공작실장은 ‘이대성 파일’을 언론에 흘렸다. 김대중 정부와 거래하거나 협박할 목적으로 ‘해외공작원 정보 보고’를 짜깁기해서 만든 것으로 의심됐다. 이 파일로 흑금성의 신원도 공개됐다. 박채서씨도 자신의 공작명이 ‘흑금성’이란 사실을 그 때 알았고 결국 그 해 8월 안기부를 그만 뒀다.

-누구보다 국보법의 문제를 뼈저리게 느끼셨을 텐데요.

“그게 참 아이러니해요. 우리 큰 아이가 북경대에 다닐 때 일주일에 한번씩 국내(한국) 이슈를 주제로 토론하는 스터디 모임을 했거든요. 유학생들끼리 고국의 시사 문제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기 위해 만든 거죠. 그때 국보법이 주제라면서 제게 의견을 구하더라고요. 노무현 정부 때였고 국보법 존폐가 논란이었거든요. 제가 그때 ‘국보법에 여러 문제가 있지만 우리나라가 처한 (분단) 상황을 볼 때는 아직까지는 필요하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몇 년 뒤에 그 법에 내가 걸린 거예요.”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국정원의 외압으로 의심되는 일들을 장시간 상세하게 말했다. 변호인조차 제대로 선임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당시 그가 도움을 요청해 변호를 맡으려다 무산된 변호사의 이름을 말하기도 했다. 이 변호사는 기자와 통화에서 “(변호해달라는) 부탁은 받았던 것 같다”면서도 “상황이 기억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당하고 보니까 이 법이 그야 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법이더라고요. 만나자고 연락하면 (국보법상) ‘통신’이 되고, 도움 주면 ‘편의 제공’이 되는 거죠. 사실 저를 정말 (법 위반으로) 걸 의도였으면, 남북교류협력법을 잣대로 삼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도 받아들였죠. 재판정에서 내가 판사한테 선언도 했어요. 변호인에게 ‘북한 체제에 동조하느냐’는 질문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요. ‘나는 지금까지 국가 위해 일한 사람이고, 애국자다. 북한은 우리 동족임과 동시에 유사 시에는 총을 들고 싸워야 할 적이다. 나는 북의 체제나 사상에 동조한 적도 없다.’ 나는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내가 안 한 걸 했다고 할 수는 없었어요.”

-2010년 6월 잡혀갈 때까지 공작 활동을 하면서 혹시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예상을 한 적이 있나요?

“단 한번도 못했어요. 그랬으면 대비를 했겠죠. 전혀 생각조차 못했어요. 왜? 그간 국가를 위한 일을 하면서 어떤 사리사욕을 챙긴 적이 없었으니까요. 조금이라도 있다면 비난을 달게 받겠지만, 그건 내 자존심이 허용하지 않는 일이기에 하지 않았어요. (쉽게 말해) 북에서 어떻게 돈을 받습니까? 굶어 죽는 사람들한테 뭘 받겠어요. 그런 나를 국가를 배신한 배신자로 낙인 찍어 버리니 참을 수가 없는 거죠.”

-수감 생활은 어떻게 견뎠나요.

“6년을 독방에서 살았어요. 원래 징벌 받을 때나 가는 방인데 말이죠. (탁자를 가리키며) 방 길이는 내가 누우면 한 뼘이 남고, 너비는 벽에 기대 앉으면 한 뼘이 남는 크기였어요(그의 키는 174㎝다). 나는 출역(교도소 내 노동ㆍ작업)도 안 시켜주더라고요. 화병이 안압으로 올라오더군요. 왼쪽 눈은 녹내장이 생겼고, 오른쪽 눈은 망막에 문제가 생겼어요. 치아도 주저 앉기 시작하더라고요. 생각을 하면 미치니까, 아무 생각을 안 했어요. 멍하니 있는 거죠.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고요. 무협지에 빠져서 무협지를 생각 없이 읽거나.”

-가족도 힘이 됐지요.

“정말 컸죠. 특히 내 집사람은 처가의 극렬한 반대에도 나를 선택한 사람이에요. 고교 수학 교사인 딸이 가진 것 없는 3사관학교 출신 대위와 결혼하겠다니 부모님이 결사 반대했죠. 아내는 (부모를 상대로) ‘단식투쟁’을 하면서까지 나라는 사람 하나를 보고 자기 인생을 결정한 사람이에요. 결혼하면서 아내한테 딱 하나를 부탁했어요. ‘내 어머니한테 잘해달라.’ 정말 잘 지켜줬죠. 나중에는 어머니의 마음을 나보다 더 잘 헤아리고, 어머니와 더 잘 통하더라고요. 나도 아내에게 도리와 의리를 다 했죠. ‘평생 여자는 당신 하나다’라는 약속을 지켰으니까요. 처음 국정원에 잡혀갔을 때 죽어야겠다고 결심했었어요. 8일을 단식하니까 수사관들이 아내를 부르더라고요. 미음 같은 걸 쒀오게 한 거죠. 그때 아내한테 ‘여보, 한국에서 살지 마. 다 정리해서 (국외로) 나가라’고 했어요. 사실 유언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돌아서는데 아내가 손을 딱 붙잡고는 ‘난 당신 믿어’ 하더군요. 그날로 단식을 풀었어요. 나를 믿어준 그 한 사람 때문에 생을 놓지 않은 거죠.”

◇“이제는 사람들이 알아주니 그나마 위안”
7월 31일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영화 ‘공작’ VIP시사회에 참석한 박채서(오른쪽)씨. 박씨가 영화 포스터 앞에서 김당 기자와 찍은 기념 사진이다. 김당 제공

-이달 평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다시 만나죠. 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텐데, 남북 문제 관련해서 하실 말씀이 있을 듯 한데요.

“두 사람이 마주하면 어떻게든 해결이 날 거라고 봐요. 지금 북한은 유엔 제재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죠. 내 단편적인 생각인지 몰라도, 이번 3차 정상회담에서 남북 간에 이산가족 개별 교류만이라도 확 트기로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북한에는 제일 급한 게 외화일 거예요. 만약에 남북 간에 교류를 풀면, 이 문제도 해결 되겠죠. 지금도 탈북자들이 중간 브로커에게 엄청난 비용을 치르면서 북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낸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잖아요. 이건 남북 지도자의 의지로 가능한 일이죠. 교류 활성화에 따른 걱정?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요? 북한과 우리는 여러 면에서 이미 대학원생과 유치원생의 차이예요. 이산가족 상봉이나 교류의 제한을 푸는 문제는 미국도 막지 못할 거예요. 역사를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죠.”

-김당 기자와 인연도 특이해요. 전직 공작원이 자신의 활동 내용과 구속 수감되기까지 일대기를 기자에게 맡길 정도로 신뢰한다니.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무슨 공작원이 기자하고 저렇게 친하냐고 할 수도 있을 거예요. 1996년 김당 기자가 (‘시사인’으로 갈라져 나오기 전의) ‘시사저널’에 있을 때 처음 알게 됐어요. 시사저널이 ‘청와대가 월드컵 남북한 공동개최를 추진하려고 현대그룹이 제공한 돈으로 구입한 밀가루를 북한에 지원했다’는 특종 보도를 했거든요. 주간지 기자들이 청와대에 민감한 내용을 보도하는 용기가 대단해 보였어요. 시사저널 편집국에 전화를 걸어서 ‘지원 시점 등이 좀 틀릴 뿐 보도 내용은 사실’이라고 말해줬죠(당시 박씨는 자신을 중국을 오가며 대북사업을 하는 ‘장 선생’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그 때 추가 제보를 하려고 김 기자를 만났어요.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죠. 그런데 시간을 두고 보니, 정도를 걷는 기자더군요. 그때도 지금도, 만나기 어려운 기자죠. 있는 거 없는 거 다 쓰는 기자들도 많잖아요.”

두 사람의 인연은 아마도 기자와 공작원이 상대를 대하는 공통의 불문율인 ‘불가근 불가원의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이어질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옥중에 있어) 우리 가족의 곁을 지킬 수 없을 때도 김 기자는 내 아내와 딸들을 챙겼어요. 간첩 혐의로 구속되니 친형제도 등을 돌렸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죠. 기자와 취재원이라는 관계를 떠나서 인생의 버팀목이에요.”

출소 전 옥중에서 써내려 간 수기를 김 기자에게 ‘알아서 해달라’며 맡긴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중국에서 만난 친구들도 나를 도와줬죠. 내가 옥중에 있는 동안 딸들에게 연락을 했다고 해요. ‘네 아버지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친구니까. 이 일이 중국에서 벌어졌으면 도왔을 텐데 한국이라 그러지 못하니, 아버지가 출소하는 대로 연락 달라고 전해주거라’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눈물이 나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국가는 나를 버렸는데, 타국의 친구들은 나를 돕겠다고 6년을 기다렸다니.”

-공작원으로 산 삶을 후회한 적은 없나요?

“이런 말 하면 입에 발린 소리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후회란 건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얘기예요.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죠. 국가에서 강요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 정도의 투철한 사명감이 없다면 이 험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요?”

◇“재심 청구해 치욕 씻고 명예 되찾을 것”

-재심을 청구할 생각은 없나요?

“해야죠! 내가 북한에 국가의 안위와 관련된, 국가에 해를 끼치는 정보를 넘길 정도로 사상과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지요. 내가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은 혐의를 덮어 씌운 건, 내가 내 목숨을 걸고 밝혀야 할, 견딜 수 없는 문제예요. 특히 작계와 관련한 혐의는 꼭 재심을 청구해서 무죄 판결을 받아야 해요. 나뿐 아니라 김 장군의 명예 회복도 걸려있으니까요.”

-‘인간 박채서’를 지켜온 삶의 도는 무엇인가요?

“내 신념과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가려서 이걸 지키며 살아왔다는 것. 쉬운 것 같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장교로서, 공작원으로서, 남편으로, 아버지로서. 신뢰가 깨지는 건 단 한번이에요. 내가 한번 국가를 배신한다? 그건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나는 쉽게 갈 수 있는 길처럼 보일지라도 그 한번을 택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진짜 억울하지 않은가요?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존재할 수 없어요.”

그 속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억울하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의 총체를 부정하는 게 돼버리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짐작했다. 대신 그는 요즘 위안이 된다고 했다. “책으로 영화로 자신의 사연을 접한 시민들이 알아주어서.” 인터뷰 말미, 그는 실은 속병이 들어서 위험한 지경이라는 말을 했다. 정신과 의사가 상담을 하더니 이 정도로 극심한 우울증인데 어떻게 정상적인 생활을 하느냐고 되물었단다. 지금 자신을 지키는 건 가족을 떠난 6년의 공백을 채우려는 책임감이라고 했다. 박채서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을 걸고 한 점 부끄럼 없이 나라를 위해 일했다고 자부하는 사람. 그런 국가에 배신 당해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않는 사람. 그에게 이제는 국가가 답해야 할 차례다.

그는 이제 재심으로 자신의 명예를 되찾으려고 한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ilbo.com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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