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말코, 네 이름'. 문학동네 제공

당신은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다. 직업은 일러스트레이터. 그림을 그린다. 디자인도 한다. 아내 이름은 아네, 사이가 꽤 좋다. 아들 테오는 여덟 살이고 에일리언과 헐크에 푹 빠져 있다. 단란하다. 지금 아내가 둘째를 낳았다. 아무런 예고 없이, 예상보다 빨리, 예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말코가 당신에게 왔다. 몸이 물렁하다. 눈이 찢어졌다. 그림 그리는 일이나 아이 낳아 키우는 일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 만한 나이다. 그래도 다운증후군이라니. 언젠가 당신은 이런 기도를 올렸었다. 조건 없는 사랑, 티끌 한 점 없는 진실한 사랑을 경험할 기회를 달라고. 맙소사. 신은 생각보다 귀가 밝았다. 맙소사. 이제 당신은 무얼 해야 할까. 무얼 할 수 있을까.

‘말코, 네 이름’은 무려 148쪽에 이르는 논픽션 그림책이다. 말코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는 이 책 속에서 작가 구스티는 자신의 갈등과 번민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는 종이 귀퉁이에 끼적끼적 낙서를 했다. 그저 “아니야”만을 사납게 외치는 얼굴, 자신을 똑바로 보라고 말하는 조그만 아이. 그는 아예 그림 속으로 들어가 사라지려는 자신을 그리고, 자신을 한입에 삼키려 드는 늑대를 그리고, 망친 그림으로 가득 찬 휴지통을 그리고, 리셋하고 싶은 욕망을 담아 지우개를 그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이런 그림뿐이었으니까. “아들 말코가 태어났어요. 말코는 엄청난 군대를 이끌고 내 성으로 쳐들어왔죠.” 군대가 쳐들어온다. 아늑한 나의 성이 곧 불타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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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티에 비해 아네는 의연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네가 말코에겐 “그렇게” 태어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그렇게 태어날 권리, 말코의 권리. 아네는 말한다. “나는 허약한 아이를 낳았고, 그래서 사랑이 두 배로 필요”하다고. 사랑이 많은 아이 테오에게도 동생은 그저 동생이다. 얼굴이 빨갛든 파랗든, 키가 크든 작든 뚱뚱하든 상관없다. 말코는 함께 핫초코를 마실 “사랑스러운 내 동생”이다. 그러니 구스티도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할 밖에. 그림을 그리는 일, 아이를 키우는 일. 그리고 말코를 똑바로 바라보는 일.

서로 부대끼며, 지지고 볶으며, 울고 웃고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네 식구의 하루하루가 참으로 정겹다. 옆집 같고 윗집 같고 꼭 우리 집 같다. 작가는 다운증후군이라는 단어로 함부로 뭉뚱그릴 수 없는 한 아이의 개성과 매력을, 말코의 온전한 모습을 오롯하게 그려낸다. 때로는 만화처럼 오밀조밀하게, 때로는 자유분방한 드로잉으로 재기발랄하게, 때로는 사실감을 돋우는 사진이나 색감 화려한 그림으로 대범하게. 펜, 마카, 색연필, 물감, 포토콜라주, 만화, 드로잉, 손글씨…. 다양한 재료와 기법만큼 말코의 성장 과정도, 가족의 일상도 새록새록 흥미진진하고 알록달록 다채롭다.

문학동네 제공
말코, 네 이름
구스티 글․그림, 서애경 옮김
문학동네 발행∙148쪽∙1만6,800원

말코가 엄마 아빠 침대에 뛰어든다. 밤새도록 걷어찬다. 잠이 부족한 아빠를 기어코 일으킨다. 형 주위를 알짱대며 따라한다. 고집을 부린다. 하지 말라는 짓을 골라 한다. 해맑은 얼굴로 깔깔 웃는다. 얼음땡 놀이를 한다. 비둘기를 쫓는다.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른다. 맘에 드는 아이를 얼싸안는다. 아빠와 그림을 그린다. 노래를 부른다. 병원에 간다. 학교에 간다. 친구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울린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운다. 말코가 자란다. 말코와 함께 모두가 자란다. 성은 불타지 않았다. 전보다 좀 시끄럽고 번잡할 뿐.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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