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은거의 뜻을 접다

채제공 우의정 등극 극적반전에
반목하던 이기경도 꼬리 내리며
“애초에 아무일도…” 긴 사과 편지
다산, 3월 반시에 수석 차지하자
임금이 다산을 따로 불러 대화
‘천주교 신앙 묵인’ 암시 있었나
詩에 본격적인 출사 결심 비쳐
반교 김석태 위한 이례적 제문이
그와의 끈끈했던 관계 짐작게
다산, 10인의 신부였다는 증거로
다산의 문집 '여유당전서'에 실린 '제숙보문'(왼쪽 끝부분). ‘숙보’, 곧 정미반회사가 일어났던 곳의 집주인 김석태를 애도하는 글이다. 천주교 관련 기록을 찾기 어려운 가운데 김석태와의 깊은 친분을 대놓고 드러낸 이 기록은 천주교에 대한 다산의 열망을 상징한다.
이기경에게 보낸 다산의 사과 편지

홍낙안의 직격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1788년 1월 7일의 인일제(人日製)에서 2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임금은 따로 다산을 불러 격려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홍낙안은 무시당했다.

세 해 뒤인 1791년 이기경과 다산이 다시 전면전을 펼쳤을 때 상중의 이기경은 이른바 초토신(草土臣) 상소를 올렸다. 이 글 속에 당시의 일이 나온다. 반교집회에 함께 있던 강이원과 또 다른 진사 성영우가 자신을 찾아와, 정약용이 그대에게 유감이 있다고 하면서, 과거장에서 명성을 다투던 처지라 시기하는 마음으로 이런 말을 퍼뜨렸다고 말하더란 얘기를 전했다. 이기경은 “내 마음은 그를 사랑하는데, 그가 그렇게 말하더란 말인가?” 하며, 자신의 진심을 내보이는 뜻에서 일부러 인일제에 응시하지 않았다.

다산은 이기경이 시험에 응시하지 않은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다산은 앞서의 은근한 협박 편지에 이어 이기경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이때 다산이 보낸 편지는 전문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이기경의 상소문 속에 “근래 이리저리 더 물어보고서야, 형께서 한 말이 누구를 향하고 아무개를 향하였고, 또한 ‘반회’라는 두 글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소. 더더욱 그대가 우리나라의 인물인 줄을 믿게 되어, 이 같은 속마음을 털어 놓는 것이오”의 구절과, “이왕 나를 한번 버렸으니, 두 번 버리는 것이 무에 어렵겠소. 청컨대 다시 거두어 주시구려”라는 한두 대목만 남아있다.

이 말대로라면 다산은 자신이 이기경에게 오해를 거두었고, 이에 정식으로 사과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던 셈이다. 다산은 더 이상의 확전을 원치 않는다는 명확한 의사를 한 번 더 밝혔다. 이기경은 다산의 이 편지가 어쩔 수 없어 임시방편으로 한 사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했다.

이기경의 답장

이 일이 있은 직후인 2월에 채제공이 우의정에 올랐다. 대부분의 남인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던 상황에서 극적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이기경으로서는 다산을 더 건드려 득될 것이 하나 없었다.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이기경은 2월에 다산의 앞선 두 통의 편지에 대해 아주 긴 답장을 썼다.

“근래의 일이야 어찌 일이라 할 만한 일이 있겠소. 일이 있은 뒤에 큰 일인지 작은 일인지를 논할 수 있을 텐데, 애초에 일이라 할 만한 일이 없었으니 다시금 어찌 일이 많겠소. 이른바 일이란 것을 내가 알고 있소. 이것은 중간 사람이 내 이야기를 얽어 분주하게 양민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애쓴 것에 지나지 않소.”

우리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했다. 앞서 다산의 사과 편지에 대한 화답이다. 중간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문제를 만든 것이지 자신은 실제로 다산에게 해가 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한 말을 하나하나 적시하며, 만약 이 말 외에 다른 말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면 어떤 나무람도 달게 받겠노라고 했다. 그 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정 아무개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혹 그 책을 들춰 보았지만, 근래에는 벗어났으므로 나의 우정은 전날과 한 가지다.” 이어 자신이 다산에게 준 그간의 충고는 오래 고심한 충정에서 나온 것이지 해코지 하려는 뜻이 아님을 길게 설명했다. 편지의 끝 대목은 이렇다.

“근래의 일은 혹 우리만 알고 남은 모른다고 했는데도, 우리의 동정 하나하나를 남들이 먼저 알고 있소. 이제부터는 굳이 남이 모르게 하려 하지 않겠소. 단지 남이 모두 알게 해서 내게 손해 없기를 구함이 좋을 성 싶소.”

당시는 양측 모두 총력을 다해 여론전을 펼치던 상황이었으므로, 다산에게 더 이상 언론 플레이를 하지 말고, 자신의 진심을 알아 줄 것을 당부한 내용이다. 홍낙안의 대책문이 불발되고, 다산이 높은 등수를 얻은 데다, 그의 우군인 채제공이 우의정에 오르자, 형세가 크게 불리함을 깨달은 홍낙안과 이기경 측이 슬쩍 꼬리를 내림으로써 정미반회의 일은 그럭저럭 무마되어 큰 소동 없이 가라앉고 말았다.

김석태를 애도함

앞서 말했듯 당시 천주교의 서울 본부는 난동과 반교 두 곳에 있었다. 이중 반교는 정미반회사가 일어난 김석태(金石太ㆍ다산은 ‘錫泰’로 썼다)의 집이었다.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김석태가 세상을 떴을 때 다산이 그를 위해 지은 제문이 다산시문집에 실려 있다. ‘제숙보문(祭菽甫文)’이 그것이다. 다산은 숙보가 반촌주인(泮村主人) 김석태의 자라고 썼다. 그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데 다산의 제문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

지극 정성 하늘 뚫고

지극한 정 땅과 통해.

나를 위해 잠을 깨고

날 위해서 잠들었지.

가정에는 소홀해도

날 위해선 꼼꼼했고,

세상일엔 느렸어도

내 일에는 재빨랐지.

내 잘못을 지적하면

크게 성내 칼 뽑았고

나 좋다는 사람에겐

그를 위해 몸 바쳤네.

혼마저도 배회하며

내 곁에 여태 있네.

저승 비록 멀다 하나

가서도 날 생각하리.

至誠徹天 至情徹地(지성철천 지정철지)

寤爲余寤 寐爲余寐(오위여오 매위여매)

闊于家室 而爲余密(활우가실 이위여밀)

慢于趨逐 而爲余疾(만우추축 이위여질)

余咎人摘 拔劍大嗔(여구인적 발검대진)

人與余好 爲之糜身(인여여호 위지미신)

魂兮遲徊 尙在我側(혼혜지회 상재아측)

九原雖邃 逝將相憶(구원난수 서장상억)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이나 사실을 남기지 않고 검열했던 다산이 김석태의 제문을 남긴 것은 이례적이다. 둘 사이가 그만큼 끈끈했다는 증거다. 반촌 김석태의 집은 천주교 교리 공부를 위해 어쩌다가 임시로 잠깐 빌려 쓴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은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중요한 결정이 이뤄지던 중심 공간이었고, 김석태는 그곳을 지키면서 다산의 보좌 역할을 맡았던 충직한 집사였다. 다산이 10인의 신부 중 한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또 다른 증거다.

김석태는 지성으로 다산을 도왔다. 다산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다산을 해코지 하려는 사람에겐 성을 내며 칼을 뽑기까지 했다고 썼다. 죽은 그의 넋이 여태도 자신의 주변을 떠돌고 있다든지, 저승에 가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할 것이라든지 하는 표현은 두 사람의 농밀했던 정의 자취를 잘 보여준다. 김석태는 한국천주교회가 기억해야 할 이름 중에 하나다.

천주교 문제가 제기됐음에도 정조는 다산을 희정당으로 불러들여 출사를 명했다. 정조는 천주교 문제를 묵인해준 것일까. 문화재청 제공
출사의 결심

다산은 여전히 천주교 신앙과 과거 응시 사이에서 깊이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달 뒤인 3월 3일에 치른 반시(泮試)에서 다산이 수석을 차지했다. 임금은 이때도 다산을 따로 불러 은혜로운 말씀을 내렸다. 당시 희정당에서 임금을 뵙고 물러나며 쓴 시가 ‘삼월 삼일 희정당에서 임금을 뵙고 물러나와 짓다(三月三日熙政堂上謁, 退而有作)’이다.

새벽빛 물시계를 재촉하는데

문창성이 자미원을 가까이했네.

글재주 잗단 기량 부끄럽건만

관원에 견준대도 드문 은혜라.

꽃 버들에 임금 수레 옮기실 적에

바람 구름 백의에 감돌았었지.

임금 말씀 폐부를 깊이 적시니

살든 죽든 돌아간다 감히 말하랴.

曙色催銀漏(서색최은루)

文星近紫微(문성근자미)

技慚雕繪小(기참조회소)

恩比搢紳稀(은비진신희)

花柳移紅輦(화류이홍련)

風雲繞白衣(풍운요백의)

玉音淪肺腑(옥음륜폐부)

生死敢言歸(생사감언귀)

1,2구는 수석으로 뽑혀 서광이 비치면서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게 된 기쁨을 말한 것이다. 따로 불러 격려를 주신 것에 대한 감격이 3,4구다. 임금은 폐부를 적시는 은혜로운 말씀을 내게 주셨다, 그러니 이제는 죽든지 살든지 감히 돌아가 은거하겠다는 말을 드릴 수가 없게 되었다고 했다.

시의 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날 은혜로운 말씀이 계셨으므로, 비로소 벼슬길에 나갈 결심을 했다.(是日有恩言, 始決意進取.)” 정조는 다산의 의중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날 수석 합격으로 회시(會試)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자, 다산을 따로 불러 어서 벼슬길에 올라 자신을 도우라는 옥음(玉音)을 내렸고, 이에 감격한 다산이 비로소 은거의 결심을 접고 벼슬길에 본격적으로 나아갈 결심을 했다는 내용이다.

정조가 이날 내린 은혜로운 말씀은 그 내용이 궁금하다. 다산의 천주교 신앙을 묵인하고 벼슬길을 병행할 수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다산은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벼슬길에 진입하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더없이 큰 임금의 사랑에 감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산은 1788년 8월의 도기(到記)에서 한 번 더 불합격했다. 다산과 그럭저럭 갈등을 봉합했던 이기경은 8월 26일, 다산이 탈락한 도기에서 수석으로 합격해 곧장 전시(殿試)로 나아갔다. 여기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길이 엇갈렸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인기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