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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고딩 동창 예찬

입력
2018.09.04 18:35
수정
2018.09.04 20:0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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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드니 동창을 자주 만난다. 내 나이쯤 되면 출퇴근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정년이 늦은 교직자나, 평생 자격증을 지닌 전문직, 사업하는 친구를 빼고는 이제 명함이 없다. 당연히 시간이 많다. 물론 젊을 때부터 노후설계를 알차게 해놓아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삼식이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그럴 때 가장 만만한 것이 동창이요, 동창회다. 대한민국의 은퇴 가장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동창을 찾는 건 일종의 회귀 본능 같다. 사람은 나이 먹어가면 귀소 본능이 살아난다. 옛이야기 지줄대는 고향마을 실개천이 불현듯 생각나고, 어느 날 꿈에 홀연히 나타난 아버지 묘소를 찾아 잡초 몇 개 뜯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아부지예, 이만하면 저도 잘 살았지예, 그런데 진짜 힘들었거든예~” 속으로 중얼대다 괜스레 눈가를 적시기도 한다.

누구는 초딩 동창이 좋다지만 나는 고딩 동창이 백 배 좋다. 초등학교 동창은 그저 편하다. 한 동네 살면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벌거벗고 물장구치며 볼 거 다 보면서 놀았으니 가릴 게 없어서다. 또 보자마자 반말 터주는 영숙이, 한 손으로 막걸리 수작할 수 있는 순자도 있으니까.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냥 거기서 끝이다. 사실 유년의 기억은 희미한 풍경화다.

고등학교 동창은 격(格)이 좀 다르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평생 공유하는 스토리가 많다. 아픈 청춘의 첫 페이지를, 질풍노도의 시작을, 말죽거리 잔혹사를 함께 헤쳐나간 이들이다. 나이 열일곱은 아이와 어른의 애매한 경계선에 파종된 꽃씨다. 개화의 시기는 달랐겠지만 같이 비를 맞았다. 그 미숙한 열정과, 대책 없는 욕망과, 미욱한 앎을 서로 기억한다. 그 시절 방황하지 않은 고교생이 어디 있었으랴. 우리 모두는 싱클레어였다.

이제, 귀거래사는 평등하다. 우리는 1등부터 꼴찌까지 성명과 석차가 나열된 방(榜) 속의 경쟁자였지만, 교련 시간의 전우이자 단체로 빳다를 맞은 공범이었다. 이제 그놈이 다 그놈이다. 백설이 내려앉은 놈이나 얄밉게 팽팽한 놈이나 그 낯짝이 그 낯짝이다. 1번 오○만이도, 62번 문○종도 키 순서에 따라 우열 있는 삶을 살지도 않았다. 기사 딸린 관용차를 타고 다닌 친구나, 대기업 CEO로 신문지상에 이름 오르내리던 친구나 그냥 “○○아”로 불리는 자연인이 됐다. 사회에서 잘나갈 때는 사람이 엄청 꼬였겠지만 이제 끈 떨어진 사람에게 그럴 일은 없다. 서로가 김영란법에 위배될 일도 없다.

다들 열심히 살아왔다. 우리 때는 고교평준화 직전이었기에 아무런 연이 없는 서울놈 촌놈 720명이 전국 8도에서 다 모였다. 그 출사표에 영예의 깃발만 펄럭였을까. 출세와 양명과 축재의 세상살이 콘테스트에서 누군가는 물살을 가로지를 마지막 힘이 딸려 지느러미 찢긴 채 남대천 그 언저리에서 한참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모천(母川)은 하나다. 동창은 그 모천이다. 이제 스승은 보이지 않는다. 각자가 서로의 스승이 됐다. 그의 주름살이 내 주름살이요, 그의 면상이 내 얼굴이다. 비록 자식들에게 헬조선을 남겨줬다지만, 중동의 사막에서 땀에 전 난닝구 빤쓰 빨아가며 씩씩하게 살아왔다.

젊음이 노력의 보상이 아니듯 늙음이 과오는 아니다. 며칠 전 그들과 호프집에서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 응원을 목 터지게 하며 밤 이슥하도록 통음했다. 학창시절에는 서로 잘 몰랐던 동창들이다. 한 놈이 경작하는 시골 은행농장에서 자발적 노동을 함께 한걸 핑계로 결성한 끈끈한 8인의 소모임, 이름도 낭만적인 ‘행화촌’이다. 평생을 이해타산 속에서 살아왔지만 이제 계산서도 영수증도 필요 없는 동네. 그게 고등학교 동창이다. 누가 먼저 가냐 늦게 가냐, 순서만 남았다.

한기봉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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