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좀 줄어든 것 같지만, 부서 회식처럼 공식적인 술자리에서 건배사는 거의 빠지지 않는다. 주로 그 자리의 최고령 혹은 최선임자가 참석자들을 격려하거나 화합을 도모하자는 취지의 훈훈한 이야기(때론 잔소리지만)를 한 뒤 건배사로 마무리하곤 한다. ‘적반하장’(적당한 반주는 하나님도 장려한다) 같은 사자성어를 적절히 사용해 웃음을 주기도 하고, ‘이 멤버! 리멤버!’ 처럼 흔하지만 무난한 건배사를 외치기도 한다.

이제 자신의 할 일은 후배나 부하직원들의 얘기를 듣는 것만 남았다는 듯 상사가 “자,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하자”고 하는 순간 아랫것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건배사 파도타기가 시작됐을 때 미리 여러 개를 준비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면, “건배사 같은 건 이제 안 하면 안되나”라는 생각은 사치다. 내 차례가 돌아오기 전까지 남들이 하지 않을 만한 것들을 떠올려야만 한다. 성의 없다거나 재미없다는 말은 듣기 싫고, 그렇다고 너무 튄다는 얘기도 듣고 싶지 않다. 간신히 하나 짜냈는데 앞사람이 날름 선수를 쳐버리면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이때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보통 동원하는 것이 소속 부서나 모임의 성격이 들어간 건배사를 하는 거다. 도드라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당하지도 않는다. 기자가 속한 회사는 “한국! 한국인! 한국일보!”라고 한다. 서울대 출신은 “위해서”, 고려대 출신은 “위하고”, 연세대 출신은 “위하세”라고 한다는 얘기도 들어봤다. 실제 서울대 출신의 한 교수는 고려대에 자리잡은 뒤 “위해서”라고 건배사를 했다가 “위하고”로 급하게 바꾸었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나마 이 정도면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

연말이 한참 남았지만 건배사 얘기를 늘어놓은 건 최근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에 앞장 섰던 당시 법원행정처의 회식 자리에서 오고 갔다는 건배사를 들었기 때문이다. ‘처화만사성’(처장이 즐거우면 모든 일이 다 이뤄진다) ‘처결우한’(처장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인명재처’(법관 인사는 처장에 달렸다).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을 향한 구애가 용비어천가를 무색하게 할 정도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KKSS’를 주로 애용했다고 한다. “까라면 까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는 뜻이란다. 처장한테 이 정도였으니, ’제왕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는 어땠을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실제로 양 전 대법원장을 만족시키기 위해 체육대회를 6개월 이상 준비하고, 법원 여직원들은 ‘어우동’ 복장을 한 채 춤을 췄다는 보도도 나왔다. 처장 회식 자리에도 심의관들은 색동옷 등을 입고 참석하라는 임 전 처장의 지시를 받았다는, 믿기지 않는 얘기들도 들린다.

엘리트가 모였다는 법원, 그 중에서도 최상위 실력자들만 간다는 법원행정처에서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을까. 최근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여러 문건들에서 이들이 스스로를 ‘사법행정 라인’이라 부르는 걸 보면 이해가 간다. 스스로를 일종의 조직으로 인식하고 조직화해 움직인 것이다. 그렇다면 조폭들이나 할 법한 유치찬란한 건배사나 행사에서의 코스프레가 이해된다. ‘CJ’(Chief Judgeㆍ대법원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였겠지. 조직 장악력을 중요시했다는 양 전 대법원장은 숙원 사업인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국민의 권리 따위는 내팽개친 판사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영화 ‘대부’에서 미국 갱들이 ‘돈 꼴레오네’를 ‘대부’라 부르며 무릎 꿇은 대가로 사업권을 유지했듯, 엘리트 판사들은 CJ에게 충성해 무엇을 얻었을까.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묵묵히 고민하고 외롭게 판단을 내리고 있는 대다수의 판사들은 그러하다. 법원은, 사법부는 조직이어선 안 된다.

안아람 사회부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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