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제작된 ‘앵무새 죽이기’는 같은 이름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 영화는 백인 여성을 겁탈하려 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남성의 재판과 그 변론을 담당한 백인 변호사를 모티브 삼아 미국 남부 지역의 인종 문제를 다뤘다. 사회 일반의 편견에 맞서 소수자의 변론을 맡는 것이 변호사의 임무라는 점에서 ‘앵무새 죽이기’는 법조윤리 강의에서 변호사 윤리의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는 영화 초입 부분에 주인공인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가 해가 지기 전에 퇴근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직장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많은 변호사들이 야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시절에 미국 변호사가 오후에 퇴근하여 아이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게 무척 생경했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에 나오는 ‘앵무새’는 죄가 없고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이다. 이 영화에서 앵무새는, 힘든 집안일을 하는 백인 여성을 도와주다가 누명을 쓴 흑인 남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앵무새 죽이기’는 그 무고한 존재가 재판 제도를 통해 합법적으로 죽음을 선고받는 것을 뜻한다. 영화에서 백인 배심원단은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가엽게 여겨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일을 했다는 점에 분노하고(그건 백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흑인 피고인에게 유죄 평결을 내린다. 그러나 애티커스 변호사가 아이들에게 공기총을 선물하며 당부한 것처럼, 총을 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무고한 앵무새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최근 들어 최저임금 인상과 연장 근로시간 단축 등과 관련해서 경제 신문 등에서 ‘착한 정책’이라는 이름을 붙여 비판하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정부의 노동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비판의 수식어로 ‘착한’이란 형용사를 쓰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 스스로 다짐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착한 마음과 행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필수 덕목이고, 모든 종교와 윤리에서 목표로 삼는 인간의 이상적 모습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어떤 정책에 대해 ‘착하다’란 형용사를 붙여 비판할 수 있다고 마음먹는 것은, 어떤 측면에선 우리 사회의 천민 자본주의적 민낯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보기이다. 만약 정부의 노동 정책이 착한 뜻에 기초한 것을 인정한다면, 그 정책의 성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비판의 시작이 ‘착하다’란 낱말이어선 안 된다.

착한 정책의 하나로 거론되는, 한 주의 연장 근로시간을 12시간으로 제한하는 이른바 ‘주 52시간제’는 그 동안의 근로시간 제도 개혁이 실(實) 근로시간의 감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반성에서 나온 대안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근로시간 축소 정책은 법정 근로시간을 감축하는 방식(예컨대 주 44시간 → 주 40시간)으로 이뤄졌으나, 이것은 연장 근로시간만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포괄임금제와 같은 편법은 기업이 근로시간을 마음대로 연장하는 수단이었다. 이렇게 연장 근로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노동조합도 적절한 조절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주 단위의 연장 근로시간을 축소한 것은 이러한 과거의 정책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그런데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일부 기업은 이를 빌미로 인력 감축을 계획하고 부서별 복리후생비를 줄이며 모든 회식을 금지하는 등 지나친 대응을 하고 있다. 이는 주 52시간제의 목표가 아니다. 주 52시간제와 관련해서는 과거와 다른, 좀 더 합리적으로 노무 관리를 하는 것이 요청될 따름이다. 그것이 이 정책의 목표이다. 따라서 그 정책이 선한 의지에서 시행되었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착하다’며 비아냥거릴 것이 아니라, 노사정 및 여야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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