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페미당당'의 활동가들

26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시위 <나의 몸은 불법이 아니다>에 참여한 125명의 여성들이 자연유산 유도약인 '미프진'을 삼키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 시위는 페미니즘 단체 ‘페미당당’이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 낙태 금지 국가들에 미프진을 보내주는 네덜란드 시민단체 ‘위민온웹’과 함께 주최했다. 연합뉴스

“수능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초기 임신 중단을 하지 못해 수술대에서 죽는 청소년 여성이 더는 없기를 요구합니다. 수술 비용이 없어 가짜 약물을 구입하고 합병증을 겪는 여성이 없기를 요구합니다. 접수대에서 거부당해 여러 산부인과를 전전하는 여성이 없기를 요구합니다. 모두가 무료로, 안전하게 접근 가능한 임신 중단을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합니다.” (26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요구 집회 ‘나의 몸은 불법이 아니다’ 125인 선언문 中)

선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약을 삼킨다. 거리를 가득 메운 ‘검은 여성’ 125명, 국내에서 한 시간 동안 낙태하는 여성의 숫자다. “약물로도 낙태가 가능하다고? 놀라며 반문하시는 분들이 많죠.”(페미당당 정소영(23) 활동가) 이들이 삼킨 ‘먹는 낙태약’ 미프진은 임신 초기(1주~9주) 태아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영양 공급을 억제하고 자궁을 수축시켜 유산을 유도하는 약물이다. 전 세계 67개국에서 합법적으로 판매되고 있을뿐더러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인정한 필수의약품 중 하나지만 이 땅에선 수입도 유통도 모두 ‘불법’이다. 낙태하는 여성이 ‘죄인’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나의 몸에 대한 나의 결정을 숨겨야 할까요? 나의 몸은 불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여성의 손에서 여성의 손으로 우리는 알약을 나눠 갖습니다.”(페미당당 우지안(24) 활동가) 누군가는 미프진을, 누군가는 미프진처럼 보이는 비타민을 삼켰다. 누가 ‘진짜 미프진’을 먹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 약을 삼킨 이들의 임신 여부를 강제로 알아낼 수 없기에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호한다. 하나의 검은 물결이 된 여성들은 더 이상 불행한 운명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개인이 아니다. 그래서 힘 있게 외칠 수 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 손으로 결정할 권리’를 달라고.

2016년부터 2년째 낙태죄 폐지운동을 전개해온 페미당당 활동가들을 30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왼쪽부터 김민아(27), 정소영(23), 우지안(24), 김예지(24) 활동가. 홍인기 기자

“바로 그게 목적이었죠. 임신 중단은 부끄러운 게 아니야. 이렇게 대낮에, 길거리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야. 그걸 보여주는 것이요.”(정소영) 지난 26일, 보신각 앞을 메운 이 ‘검은 여자들’의 선두에 선 이들이 있었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근조 리본을 두른 영정 크기의 거울을 들고 나타나 강렬하게 존재감을 각인했던 ‘페미당당’의 활동가들이다. “낙태가 ‘불법’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헤매다 시술 적기를 놓친 여성들은 수술대 위에 죽거나 평생의 후유증을 안고 살아갑니다. 보건복지부, 과연 당신들이 말하는 국민에 여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페미당당 김민아(27) 활동가)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소원 결정을 미루는 사이, 보건복지부는 낙태 시술을 한 의료인에게 자격정지 1개월이란 엄포를 놓았다. “2016년 10월 첫 ‘검은 시위’에 같이 나설 때만 해도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낙태죄 반대에 맞서 싸워야 할 줄은 몰랐죠.” (페미당당 김예지(24) 활동가) 산부인과 의사들까지 ‘낙태 시술 전면 거부’를 선언한 바로 다음 날, 세종대로 한국일보 본사에서 페미당당 활동가 4인을 만났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의 몸이야말로 이 시대의 마지막 전쟁터”라고.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2016년 5월 페미당당 활동가들은 검은 옷과 근조 표시가 붙은 거울을 들고 강남역 10번 출구 앞을 침묵 행진했다. 당시 그들은 지나가는 시민들을 거울로 비춤으로써 ‘이 사회를 사는 여성은 모두 혐오범죄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렸다. 우지안 활동가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두고 ‘여성들이 자신의 문제를 모두의 문제로 호명해내고, 집단적 주체로 거듭난 사건’이라고 평했다. 연합뉴스
◆조국 수석의 답변 이후 9개월, 달라진 건 없다

“현행 낙태죄에서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있습니다” 지난해 9월, 한 달 만에 23만 명의 서명을 모으며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를 뜨겁게 달군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의 답변은 일견 희망적이었다. “조 수석의 답변을 들으면서 문재인 정권이 ‘확실한 액션’을 보여주리라는 자그마한 기대가 생겼었죠. 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을 보면… 오히려 박근혜 정권 때보다 퇴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페미당당 김예지(24) 활동가) 지난 30일 선고기일을 마지막으로 이진성 헌법재판소 소장을 비롯한 재판관 5명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2017년 2월에 제기됐던 낙태죄 헌법소원에 대한 결정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반드시 이번 임기 내로 결정이 나올 거라 예상했던 여성계는 망연자실한 상태. 조 수석이 약속했던 ‘임신중절 수술 실태조사’는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시작도 되지 못했다. “보건복지부가 2010년 이후로는 실태조사에서 아예 손을 놓았기 때문에, 사실상 정부는 상황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상태죠.”(우지안) 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2005년 연간 낙태 시술 건수는 34만 건, 2010년엔 그의 절반 수준인 16만 건이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정반대다. 음지로 숨어들어 통계에 잡히지 않는 ‘불법 시술’까지 따지면 2005년 통계의 3배에 달할 것이라는 게 현직 의사들의 분석이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추정치에 따르면 하루 평균 낙태시술을 하는 여성은 무려 3000명 가량입니다.”(우지안)

낙태죄 근거조항인 형법 제 269조ㆍ제 270조와 모자보건법 14조. 박지윤 기자

이런 와중에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 시술 전면 거부’를 선언하면서 상황은 최악이다. “여성의 몸이 또 볼모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016년에도 의사들이 ‘낙태 파업’을 선언하면서 시술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었던 적이 있어요. 원래도 불법이기 때문에 시술 비용이 들쭉날쭉하지만, 단속이 심해지면 위험부담이 커지니까 수술비가 오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럼 가장 타격을 받는 건 누굴까요?”(김민아) 저소득층 여성과 미성년자 여성이다. 수술비를 마련할 길이 없는 여성들은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배를 끌어안고 있다가 낙태 시기를 놓치기 일쑤. 임신 24주를 넘기면 수술비는 수 백 만원대로 오른다. 산모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성들의 생명권부터 짓밟히는 거죠. 그래서 낙태죄는 여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계급의 문제이기도 합니다.”(우지안) 나라의 방조 아래,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릴 여자들은 여전히 통계 바깥에 있다. 존재조차 지워진 채로.

2017년 11월 19일 페미당당 회원들은 서울 중구 서울시립 미술관 앞에 가상의 ‘미프진 자판기’를 설치했다. 버튼을 누르면 미프진이 들어있는 박스가 나오지만, 실제 내용물은 젤리와 비타민, 미프진을 설명하는 소책자였다. 김예지 활동가는 “이 퍼포먼스는 ‘남자들이 임신, 출산을 했다면 낙태약을 자판기에서도 살 수 있었을 거야’라는 한 미국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 대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외신에도 소개되면서 페미당당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홍인기 기자
◆”여성의 건강권 위해” 낙태약 지지한 프랑스 정부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체재인 약을 찾는 여성들이 많아졌지만,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처방 없이 약을 유통시키거나 가짜 약을 속여 파는 업자들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미프진도 부작용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의사의 처방을 받아 복용해야 해요. 그런데 업자들은 돈 받고 약 보내주면 끝이니까… 보통 카카오톡 메신저 1대 1 채팅으로 암암리에 거래하는데 복용법을 자세히 알려주기는커녕, 구매자를 성희롱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죠.”(정소영) 1회분에 30만원에서 60만원 사이로 가격도 천차만별. 심지어는 ‘강간 약물’이라고 불리는 수면제ㆍ마취제와 나란히 판매되기도 한다. “불법으로 미프진을 판매하는 광고를 보면 강간 약물(음료 등에 타서 순식간에 기절시키는 마약성 약물을 일컫는 말)판매 광고가 바로 옆에 떠요. 강간한 여성이 임신하면 이걸 먹이라는 건가. 허탈하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약을 찾는 여성들이 이걸 보면 얼마나 큰 좌절감을 느낄지.”(우지안)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임신 중단이 불법인 나라 여성에게 미프진을 처방해 보내주는 네덜란드의 시민단체 ‘위민온웹’의 공식 사이트를 이용하면 현지 의사가 처방한 약을 받아볼 수 있다. 하지만 약이 바다를 건너오는 데 길게는 2주 가까이 걸린다. “위민온웹에서는 임신 10주 미만까지 미프진을 보내주거든요. 그런데 만약 10주 차에 임신 사실을 깨닫고 부랴부랴 신청을 했다고 가정해보세요. 약이 통관에라도 걸리게 되면 받을 수 없을 뿐더러, 뒤늦게 받게 되더라도 쓸 수가 없는 상황이 되는 거죠.”(우지안) 최첨단의 의료 서비스를 자랑하는 나라에서 출시된 지 30년 된 약을 구하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는 사실은 ‘역설’이다. “1980년대에 프랑스에서 이 약이 처음 개발됐을 때 반대 여론이 너무 극심해서 제약회사에서 생산을 중단하려 했었다고 해요. 그걸 막은 것이 프랑스 보건국과 정부였죠. ‘이건 그냥 약이 아니라 여성들의 건강권을 위한 것이다’라면서. 이런 것이야말로 국가의 진짜 역할이 아닐까요. 이 땅의 여성들에게 국가란 과연 실체가 있는 걸까요.”(우지안)

2016년 10월 29일 서울 종로에서 열린 ‘검은 시위’ 참여 당시 페미당당의 회원들의 모습. ‘검은 시위’란 2016년 폴란드에서 시작돼 전세계적으로 퍼진 ‘낙태죄 폐지를 위한 시위’를 일컫는다. 한국에서는 2016년 10월부터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페미당당 페이스북
◆태아의 생명권,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도 포함해야

낙태죄 존폐론에서 항상 등장하는 쟁점은 다름 아닌 ‘출산율’이다. ‘낙태가 쉬워지면 저출산 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낙태를 처벌하는 게 출산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 있습니다. 1960년대 루마니아에선 인구를 늘리기 위해 낙태뿐 아니라 피임까지 금지했어요. 무려 1989년까지 낙태금지법이 시행됐죠. 결과는 어땠을까요?”(우지안) 출산율은 첫 4년 동안만 증가했고 곧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갔다. 많은 여성들이 위험을 무릅쓰고도 불법 낙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출산율은 다시 비슷해졌는데 모성사망률은요? 17년 만에 7배가 됐어요.” 낙태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낙태죄를 만들었지만, 정작 낙태를 하다가 죽는 여성들만 늘어난 셈이었다. “다 떠나서, 낙태죄를 출산율로 연결시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여성의 몸을 도구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던 70년대에는 나라가 나서서 ‘낙태 버스’를 전국에 보내더니, 이젠 저출산 시대니 임신만 되면 다 낳아라? 여성의 몸을 ‘저수지 수문’ 정도로 본다는 뜻이죠. 나라가 ‘애들이 부족하니 수문을 열어라’고 하면 여자의 몸에서 ‘응애응애’하고 애들이 나와야 한다는 것과 뭐가 다른지.”(정소영)

지난 7월 7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낙태죄 위헌 폐지 촉구 퍼레이드'에 참가한 페미당당 활동가들. 페미당당 페이스북.

이들이 쟁취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이 피임부터 임신, 임신 중단이나 출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권리, 바로 ‘재생산권’이다. “조국 수석은 지난해 답변에서 법에 예외로 인정된 사례 외에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설명했어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있거나, 이미 헤어진 남성의 아이를 임신한 경우 등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였죠. 하지만 진짜 여성들이 원하는 건 ‘넌 딱하니까 빼줄게’가 아니에요. ‘이 낙태는 되고 저 낙태는 안 된다’를 대체 누가 무슨 권리로 결정하냔 말이죠.”(우지안) 실제로 임신 중단을 허용하는 나라들의 7가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본인 요청’, 즉 ‘여성 자신이 원하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불쌍한 처지가 아니더라도, 여성은 스스로 임신 중단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 바로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을 대체 누가 대신할 수 있단 걸까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앞설 수 있느냐’는 반론엔 생명권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며 선을 그었다. ‘태아도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를 따지는 차원에서 벗어나 ‘태어난 이후의 삶이 과연 인간다울 수 있는가’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권이란 단순히 태어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포괄하는 개념인 거죠. 국가가 무방비로 세상에 나온 아이들의 삶을 책임져 줄 수 없고 그럴 의지도 없으면서, ‘태아에겐 태어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건, 결국 여성에게 그 모든 책임을 전가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해요.”(김민아)

낙태죄 폐지 피켓을 든 페미당당 활동가들. 왼쪽부터 정소영(23), 김민아(27), 김예지(24), 우지안(24) 활동가. 홍인기 기자
◆낙태 주수, 사회적 논의를 해야 할 때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주수에 따른 낙태 허용’이다. 임신 중단을 법적으로 허용한 국가들이 주로 선택하는 입법례로 스위스는 10주까지, 프랑스는 12주까지, 네덜란드와 영국은 24주까지 산모의 자유의지에 따른 ‘임신 중절’을 허용한다. “몇 주까지로 할 것인가의 기준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서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바로 그런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시점이지만, 아직도 ‘낙태가 여성의 죄인지 아닌지’를 따지고 있는 데 머물러 있으니… 정말 힘이 빠지죠.”(김민아)

단순히 낙태를 죄로 규정한 법을 없애는 차원에서 끝날 문제도 아니다. 철저한 성교육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종종 ‘낙태를 허용하면 피임에 소홀하게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표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건 정말이지 여성의 몸에 대한 몰상식에서 비롯되는 기우라고 봐요. 낙태가 허용된들 어떤 여성이 ‘좋아서’ 낙태를 하겠어요. 임신 중단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여성의 몸에 무리를 줄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건 임신 중단의 자유를 허용하되, ‘정말 몰라서’ 피임에 실패하는 이들이 없도록 하는 것이죠.”(우지안) 자극적 시청각 자료를 보여줌으로써 여성에게 ‘죄책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던 기존의 낙태 교육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한국에서 초ㆍ중ㆍ고 나온 사람 중 <소리 없는 비명>(1984)을 안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하지만 거의 왜곡에 가깝습니다.” 날카로운 수술 도구로 태아를 억지로 꺼내려는 장면, 조각난 태아의 사체가 흘러나오는 장면이 등장해 많은 이들에게 ‘낙태는 곧 살인’이라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영상이지만 이는 합법적 낙태 시술의 실상과 완전히 다르다. 영상 속 태아는 임신 3기(24주) 이상에 해당하지만, 실제로 허용된 낙태의 대상인 12주 이내의 태아는 감각이 발달하지 않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그간 이런 식으로 주입된 죄의식 때문에 여성들은 ‘낙태는 살인’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려왔죠. 이젠 벗어날 때입니다.” (정소영)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낙태 허용’에서 끝나선 안 된다는 겁니다.”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소득층, 청소년, 장애인 여성도 자유롭게 임신 중단을 선택할 수 있도록 약물과 시술을 국가가 무료 지원해야 한다는 의미의 ‘Free Legal Abortion Service’(합법적, 무료로 제공되는 낙태 서비스)를 주장한다.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말이에요. 아일랜드는 지난 5월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 66%의 지지를 얻어 낙태죄를 규정한 수정헌법 8조가 폐지됐죠.”(김민아) 한 때, 돈 있는 여성만 낙태수술을 받을 수 있는 나라였던 아일랜드는 이제 임신 12주차까지 누구나 자신의 임신을 ‘중단’시킬 수 있는 곳이 됐다. 드론까지 날려 들여오던 미프진을 병원에서 안전하게 처방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도 머지않아 이런 날이 오리란 생각으로, 내일도 힘껏 목청 높여 싸워야죠.”

02016 11월 12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3차 촛불집회에 참여한 페미당당 활동가들. 당시 페미당당은 차별과 혐오 없는 집회를 요구하며 여성들이 성희롱ㆍ성폭력 걱정 없이 시위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존’을 만들었다. 김예지 활동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면서도 그를 ‘닭년’ ‘병신년’ 등 여성 혐오적 표현으로 비하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며 “힘들고 외로운 싸움이었지만 바로 그 경험을 통해 정치적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페미당당 제공
◆“이 언니들이, 너를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거야”

2년 전 봄, 이들은 당장 뽑고 싶은 정당이 없어서, 정치에서 아무도 여성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분해서 “그럼, 우리가 한번 만들어 보자”며 페미당당을 세웠다. “여러 가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지금이야 잠정 중단된 상태지만, 무모하게라도 나서서 ‘창당’을 하겠다고 외쳤던 게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해요. 어떤 의제에서든 정치적인 액션을 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으니까요.”(김민아) 2016년 ‘여성 혐오 담론의 발원지’ 강남역에서 시작해 2017년 ‘차별 없는 촛불’을 들었던 광화문을 거쳐 2018년 ‘안희정 무죄 사법부 유죄’가 울려 퍼진 사직동까지, 여성의 문제가 있는 곳이라면 이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이유다. 그렇게 축적된 자신감이 다다른 곳이 보신각이었다.

'페미당당' 회원들은 26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에서 "임신중단권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기본권"이라고 밝혔다. 페미당당 페이스북

“그날, 많은 여성들이 마이크를 잡았어요. 낙태한 여성, 출산한 여성, 그런 여성들을 사랑하는 친구로 둔 여성… ‘원래는 내 얘기를 하려고 나온 게 아닌데…’라면서도 용기 내어 입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 거예요.”(정소영) 그간 여성에게 낙태란 삶의 일부분이 아닌 ‘예외적 불행’이나 ‘부끄럽게 여겨야만 하는 죄’로 여겨졌다. 모든 여성이 한 번쯤 고민해보거나 경험해본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공적인 언어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 문제가 되기 전까진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으니… ‘혹시라도 문란한 여자 취급을 받지 않을까’ 홀로 감내해야만 하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거죠.” 그러나 검은 물결의 여자들이 만든 ‘임신 중단 치외법권’에서 만큼은 달랐다. 모두가 소리 내어 ‘나의 운명이자, 너의 운명, 우리의 운명’에 대해 말했다. 그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참여하신 어머니 한 분이 계셨어요. 남편과 아들, 두 딸과 함께 종각 부근을 우연히 지나시던 분이었는데, 어느 순간 아들은 남편한테 맡기고 딸과 함께 대열 사이에 앉으셨더라고요.” 결의에 찬 목소리를 포개며 한 줄 한 줄 선언문을 읽어 내리는 검은 여자들 앞에서 엄마는 딸아이에게 말했다. “이 언니들이, 너를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거야.” 활동가 4명의 눈빛이 처음으로 한 점으로 모이더니 ‘반짝’하고 빛났다. 아,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다시 없을 ’혁명의 시대’라고 생각해요. 100년 만의 변화가 1년 만에 일어나는 시대.” 그렇다, 지금은 어제의 상식과 오늘의 상식이 다른 시대, 어제의 ‘당연함’이 오늘의 ‘불편함’이 되는 시대다. “사람들의 인식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정작 시스템이,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직 늦지 않았다. 이젠 국가가 ‘그 시대의 속도’에 보폭을 맞춰야 할 때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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