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림으로 보는 토끼

토끼 랄라도 미술 작품의 주인공을 꿈꾸는지 모르겠다. 이순지 기자

큰 귀와 길쭉한 몸을 가지고 있는 토끼는 특징이 뚜렷한 동물이다. 내가 키우는 토끼 랄라도 얼굴보다 큰 귀를 가졌다. 몸에는 탐스러운 흰색과 검은색 털 옷을 걸쳤는데, 가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창작 욕구가 생길 때가 있다. 당장이라도 붓을 들고,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 그림과 담을 쌓고 살던 나도 토끼를 보면 손이 근질거리는데, 화가들은 오죽했을까?

토끼를 담은 그림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고대에는 토끼가 중요한 식량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저서 ‘역사’에서 가장 얻을 것이 많은 동물로 토끼를 꼽았다. 토끼는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번식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 신화 속 ‘미의 신’ 아프로디테의 속성을 나타내거나, 연인들이 사랑을 증명할 때 토끼를 선물하곤 했다. 기원전 4세기에 발견된 그림들에는 사냥에 희생된 토끼나 구혼 선물로 토끼를 주고받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고대 이후엔 화가가 어떻게 토끼를 그리느냐에 따라 의미가 변했다. 주로 토끼는 부활, 다산, 관능의 상징으로 쓰였다고 한다. 또 노동 현장에서는 사냥감으로 그려지거나, 봄을 나타낼 때도 함께 등장했다.

‘흰토끼’를 움켜진 여성
아폴로 매거진 홈페이지

구글 등 포털 사이트에서 ‘토끼’를 검색하면 많이 나오는 그림이다. 이탈리아 화가 피에르 디 코시모가 그린 ‘금성, 화성 그리고 큐피트(1505)’라는 작품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했던 피에르 디 코시모는 강한 색채를 그림에 사용했다. 그의 그림에는 많은 동물들이 등장했는데, 토끼도 그중 하나다.

‘금성, 화성 그리고 큐피트’에는 그림 양 끝에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편하게 누워있는 여성들 사이에 흰토끼가 눈에 띈다. 토끼는 왼쪽에 있는 여성 엉덩이 쪽에 자신의 턱을 비비고 있다. 귀는 쫑긋 세운 상태다. 영국 예술 잡지 아폴로에 따르면 여기서 토끼는 ‘성(性)적 과잉’을 드러낸다고 한다. ‘성적 과잉’이라는 이미지는 구약에서 유래됐다. 어마어마한 토끼의 번식력이 ‘무자비한 성욕’과 연결된 것이다.

베첼리오 티치아노 ’성모 마리아의 토끼’. 플리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화가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작품 ‘성모 마리아의 토끼(1530)’에도 흰토끼가 등장한다. 여기서는 피에르 디 코시모 작품과는 다른 의미로 흰토끼가 쓰였다. 그림 속 성모 마리아는 오른손으로 어린아이를 감싸고 왼손은 흰토끼를 움켜쥐고 있다. 미술 평론가들은 그림 속 흰토끼를 ‘부활’의 의미로 해석한다. 화가가 어떤 의도로 그림을 그리냐에 따라 토끼의 상징이 변한 것이다.

화가들이 사랑한 ‘토끼’

수많은 토끼 그림들이 있지만 대중에게 사랑 받은 작품들은 대부분 별다른 ‘상징’을 담지 않은 경우가 많다. 토끼 자체를 정직하게 그린 그림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독일 화가 한스 호프만이 그린 ‘토끼(1585)’, 요한 게오르크 자이츠의 ‘토끼 정물화(1870)’ 등이 그 예다. 한스 호프만은 수채화를 주로 그렸는데, 숲속 토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가 그린 ‘토끼’ 그림에는 토끼에 대한 ‘상징’ 대신 살아있는 토끼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겼다. 요한 게오르크 자이츠가 그린 ‘토끼 정물화’도 그렇다. 이들 그림 속 토끼는 풀 등을 먹으며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다. 한스 호프만과 요한 게오르크 자이츠는 토끼들의 털 하나하나를 살려내 묘사했다.

한스 호프만 ‘토끼’. 제이 폴 게티 박물관 홈페이지
요한 게오르크 자이츠 ‘토끼 정물화’. 뒤셀도르프 경매 사이트

‘상징성’이 드러나지 않은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있다. 바로 독일 미술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토끼(1502)’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지금도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미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화가, 판화가, 작가 등으로 활동했던 그의 대표작은 토끼 수채화다. 오스트리아 알베르티나 박물관에 보관된 작품인데, 사실적인 표현이 인상적이다.

한스 호프만, 요한 게오르크 자이츠가 그린 토끼 그림들도 알브레히트 뒤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토끼’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여러 나라의 미술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토끼’에게 상징성은 없지만, 토끼 묘사의 정밀한 표현들이 인정받았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토끼’ 이후 무수히 많은 복제품들이 나오기도 했다.

알브레히트 뒤러 ‘토끼’. 오스트리아 알베르티나 미술관 홈페이지

자연을 그린 미술 작품들을 보면 토끼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미술 작품 속 토끼는 화가가 어떤 주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냐에 따라 상징이 변했다. 주로 사용된 상징은 ‘달의 신’, ‘부활’, ‘풍요’, ‘성적 욕망’ 등이다. 현대 미술에서는 토끼 자체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토끼의 큰 귀 등 특징을 그대로 살린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앞으로 미술관에서 토끼를 발견한다면 지나치지 말고 천천히 감상해보면 어떨까?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토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순지 기자 seria1127@hankookilbo.com

인기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라이프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