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의 화해]

일러스트= 김경진기자
#대학 못나오고 형편 어렵다고 반대
가족 등지고 한국에 온 지 9개월
남매 교육 위해 미국 이민 택해 고생한
아버지 당뇨 소식 듣고 마음 아파
남자친구와 관계 인정받고 싶어…

미국에 있는 가족을 등지고 한국에 온 지 9개월이 됐습니다. 저희 집은 제가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이민 생활이 쉽지 않았지만 가족끼리 똘똘 뭉쳐 비교적 잘 지내 왔지요. 미국에서 대학원을 준비하던 중에 지금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제가 가족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됐습니다.

남자친구는 2년 전 한국에 있다 미국으로 놀러 왔던 사람으로 친구 소개로 만났어요. 만난 지 하루 만에 남자친구는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돌아간 후에도 줄곧 전화로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얘기가 잘 통했던 저희는 몇 달 후 사귀기로 결정했어요. 서로 마음이 잘 맞았고, 대화는 늘 즐거웠습니다. 만난 지 1년쯤 됐을 때 부모님에게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런데 부모님은 ‘너를 핑계로 미국에 와서 살려고 하는 것 아니냐’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과는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 등의 이유를 들어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엄마는 칼을 들고 헤어지라고 협박하기도 했어요. 급기야 아빠는 집을 나가라고 했습니다. 집에서 쫓겨나 친구 집에 있다가 지난해 11월 한국에 왔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에서 결혼을 하겠다는 생각이었지요. 마음 한 켠에는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앞으로는 스스로 삶을 살겠다는 의지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취직을 했고, 남자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다가 최근에는 독립도 했습니다. 돈을 번 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원에 가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실망했을 부모님만 떠올리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사실 어렸을 적부터 저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한국에서 교사였던 두 분은 오빠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 못하자 이민을 결정했습니다.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닌 두 분은 미국에서 작은 가게를 꾸리며 저희 둘을 교육시켰습니다.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아빠는 낯선 환경에 대한 스트레스로 많이 달라졌습니다. 가족에게 짜증을 내는 일이 잦았고, 아무 말 없이 밥그릇을 던지기도 하셨지요. 엄마는 그런 아빠의 짜증을 묵묵히 받아 주었습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셨다고 했습니다. 그 영향인지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집념과 소망을 갖고 있어요. 아빠가 이민을 와 힘든 시기를 거치시면서 한국에서와 다른 모습을 보일 때도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참으셨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런 엄마의 희생이 감사하고 애틋했지만 엄마가 이제는 가족이 아닌 엄마를 위해서 살면 안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가 갑자기 한국으로 나오면서 엄마는 저와 화해를 했지만, 여전히 아빠와 오빠는 저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최근 아빠가 당뇨병 진단을 받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너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아빠가 병에 걸리면 제가 부양을 해야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압박감도 들고, 이제라도 아빠와의 관계를 회복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커졌습니다.

그렇지만 남자친구 상황을 아빠에게 이해받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남자친구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 증세가 심하고, 음주운전으로 교통사고가 나서 온몸이 마비돼 장기간 입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제 상황도 좋지 않고, 부부 간 불화도 큽니다. 남자친구도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기 보다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하고요. 그런 부분을 제 부모에게 얘기할 순 없습니다. 불 보듯 뻔하게 더욱 반대하시겠지요.

저는 아빠가 추구하는 안정적인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학력이 높은 사람보다 마음이 따뜻하고 힘든 순간에 서로 다독이며 나아갈 수 있는 사람과의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친구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이겨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저는 믿음직스럽고 양가가 어려운 상황에 있어도 서로 의지하고 대화를 통해 극복하고 있습니다. 우리 둘은 별문제가 없는 셈이지요.

하지만 마치 제가 한 선택이 너무나 큰 결과를 불러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하지만 부모님이 저 때문에 아직도 많이 아파하는 걸 보면 그걸 외면할 수 있는 당당함과 뻔뻔함이 없습니다. 이런 선택을 하면서도 늙어가시는 아빠와 엄마가 눈에 밟힙니다. 이 모든 상황을 뒤로 하고 몇 년간은 오로지 저를 위해서만 살아도 되는 걸까요. 부모님에게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이영주(가명ㆍ26세ㆍ회사원)

#아버지 충격ㆍ상실감부터 이해하고
미국 가서 시간 걸려도 설득 노력해야
남자친구 따뜻한 성격 잘 맞아도
취업 등 의지 없으면 결혼 어려워
미래 꿈꿀 수 있는지 고려해봐야

영주씨, 당신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노력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당신의 그런 면이 안타깝다 못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하나요? 그리고 당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우리의 인생은 그 답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이지요.

우선 영주씨의 아버지를 한번 돌아봅시다. 굉장히 올곧은 분인 것 같아요. 아버지가 자랐을 시대에는 부모 세대가 산업화 영향으로 매우 바빴어요. 지금처럼 자식의 얘기를 들어주고, 사교육을 시키고 하는 시대가 아니었죠. 그런 환경에서 아버지는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서 선망의 직업을 가지게 됐어요. 자수성가하신 분이에요. 그런 분이기 때문에 분명히 사람은 아는 게 많고 지식이 있어야 먹고산다는 생각을 오랜 세월 하게 됐을 거예요. 이 생각은 신념과 같아서 바꾸기가 참 어려워요. 아버지의 경험과 시간으로 축적된 신념이기 때문이에요. 그 신념에 따라 자식을 위해서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미국으로 가신 게 아닌가 싶어요. 오로지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가지고 말이죠.

그런 아버지가 미국의 낯선 생활을 어떻게 버텨 왔을까요. 짐작하건대 자식을 잘 키우겠다는 신념과 자식을 그 누구보다 목숨 바쳐 사랑하는 마음으로 버티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금 영주씨와의 갈등으로 신념이 흔들리는 겁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모든 걸 다 바쳐서 딸을 키웠는데, 예상치 못한 남자친구가 등장해 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것 같은 불안감이 생긴 겁니다. 게다가 평생 아버지의 삶을 버티게 해 주었던, 옳다고 생각했던 기준이 흔들리게 되었어요. 딸과는 갈등이 생겨서 멀어지게 되었어요. 이것은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이자 상실이지요.

아버지가 단순히 남자친구가 고졸이어서 반대했을까요. 아닐 겁니다. 아버지는 이 남자친구에 대해 잘 모르고, 이 남자친구로부터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겁니다. 남자친구의 대학 졸업 여부를 떠나 남자친구가 열정적으로 살거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약점인 학력을 극복하려는 의지 등을 아버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에 비해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실력을 갖췄고, 그 실력으로 자식을 훌륭하게 키운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친구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지요. 신념을 바꾼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굉장한 상실감과 우울감을 주게 됩니다. 영주씨에게 집을 나가라고 모진 말을 한 건 영주씨를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버지 스스로 신념이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그런 겁니다. 영주씨가 한국으로 오면서 아버지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평생 버텨 온 신념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엄청난 상실감과 분노를 느꼈을 거예요. 아버지의 입장도 이해가 갑니다. 신념이 강했던 만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어요. 유연하게, 좀더 부드럽게 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거예요.

영주씨의 어머니도 비슷한 분이에요. 다만 아버지보다 마음이 약하죠. 흔히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심정입니다. 영주씨에게 어머니도 모진 말을 했지만, 진심은 ‘내 모든 걸 바쳐서 너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어머니도 오로지 자식을 위해서 아버지의 짜증과 힘든 미국 생활을 견뎠으니까요. 어머니는 영주씨를 아예 못 보게 될까 봐 혹은 멀어질까 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영주씨에게 연락을 합니다. 영주씨의 교제와 뜻에 동의하는 건 아닐 겁니다. 영주씨를 잃고 싶지 않아서 마지못해 연락을 하는 거죠.

이런 부모님 밑에서 영주씨는 부모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살아왔어요. 아주 기특하고 대견합니다. 공부를 잘해야 했을 테고, 나쁜 행동은 되도록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서 영주씨의 마음도 고달팠을 거예요. 부모님과 따뜻한 저녁 한 끼, 여유로운 여행, 솔직한 대화 등을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대화가 잘 통하고, 영주씨의 삶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남자친구를 만났으니, 이보다 더 잘 맞을 순 없었을 거예요. 서로가 가정에서 받지 못했던 위로를 주고 받으며 사랑에 빠졌어요. 거기까진 좋아요. 이제 한번 생각해볼 차례에요. 남자친구가 객관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미래를 함께 꿈꿀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영주씨 결혼은 왜 하는 걸까요. 인간이 이성을 만나 사랑하면 같이 사는 걸 고려하게 되죠. 가족이 되어 대부분 자식을 낳아서 함께 기르죠. 왜 그럴까요. 잘할 자신도 없고, 행복을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냅니다. 이 용기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인간은 신뢰를 기반으로 같이했을 때 훨씬 더 힘이 나고, 덜 외롭습니다. 덜 불안하죠. 부부나 가족은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관계예요. 그 관계는 많은 걸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건 남녀 간의 불타오르는 사랑보다는 훨씬 더 넓고 깊은 수준의 감정이에요. 부부가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함께한다는 의미입니다. 경제적인 부분을 같이 해결해야 하고, 자식 교육에 대해 논해야 하고,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향후 인생에 계획을 짜고 같이 하는 일이 수도 없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마음이 잘 맞고 대화가 잘 통해야 하죠. 그건 기본이고, 삶을 계획하고 의논하며 노력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살다 보면 힘든 일, 즐거운 일, 고통스러운 일,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으니까요. 그럴 때 대화만으로 그 많은 일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대화는 소통의 기본이지만 실천을 위한 계획과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영주씨의 남자친구가 과연 그런 사람인지 스스로 되물어 보세요.

제가 느끼기에 남자친구는 해맑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이죠. 같이 있을 때 편안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할까요. 미래를 함께 꿈꿀 수 있을까요. 저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해서, 일자리가 없어서 부족한 게 아닙니다. 발전적인 모습이나 의지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고 말뿐이 아닌 실천을 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남자친구가 영주씨와 함께 가고자 한다면 남자친구는 ‘내가 반드시 학력에 대한 부분을 보완하겠다’ ‘내가 보란 듯 취업을 해서 책임지겠다’는 식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힘들 때 옆에서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게 아니라, 삶의 계획을 같이 세우면서 앞으로 나갈 방향을 찾는 것입니다. 가정형편이나 학력 등이 물질적인 기준에서 부족하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의지와 태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나는 세속적이지 않아’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세속적이지 않은 게 아닙니다. 해도 안될 수 있지요. 하지만 쉽게 포기하고, ‘난 괜찮아’ 하고 아무렇지 않은 것은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남자친구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고 영주씨 부모님 편을 드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취약한 부분을 갖고 있습니다. 영주씨는 자식을 위해서 희생한 부모님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그들이 여유가 없어 영주씨에게 감정적 만족감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없었을 거예요. 그로 인한 외로움과 공허함이라는 정서적 결핍을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 부분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우니까요.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위로를 잘해주는 사람에게 끌리기 쉽고, 강인하지 못한 사람은 강인함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끌릴 수 있습니다. 영주씨 남자친구는 영주씨의 취약한 점인 외로움을 따스하게 감싸 안아준 사람입니다. 이 부분이 너무 크게 보여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못 볼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남자친구와 부모님의 관계보다 영주씨는 부모님과 영주씨의 갈등을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재정립해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남자친구와 헤어지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일단 미국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과 마속 깊이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그 동안 부모님에게 고마웠던 것, 부담됐던 것, 참았던 것, 이해 받고 싶었던 것을 얘기해 보세요. 분명 부모님도 영주씨에게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거친 표현이나 말투에 휩쓸리지 말고 진심을 털어놓고 대화하세요. 영주씨의 부모님은 영주씨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영주씨도 마찬가지겠지요. 이 사실에 기반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부모님과의 갈등을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특히 아버지의 살아온 배경과 신념을 한번 생각해 보고, 남자친구를 핑계로 그동안 아버지에 대해 쌓아 왔던 불만들을 표출한 건 아닌지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과 영주씨의 관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분명 영향을 받게 됩니다. 영주씨는 부모님을 떠나 왔지만 여전히 부모님이 신경이 쓰이고, 편치 않습니다. 이 부분을 해결한 뒤에 좀더 성숙하게 남자친구를 어른 대 어른으로서 마주하길 바랍니다. 끝으로 남자친구 가족의 문제는 남자친구가 스스로 해결할 것입니다. 영주씨가 책임질 필요도, 책임질 수도 없는 문제이지요. 영주씨는 영주씨의 부모님과 남자친구 얘기를 제외한, 오래 묵혀둔 이야기를 마음을 열고 천천히 나눠보는 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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