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석의 성경 ‘속’ 이야기]<45> 뒷북치는 교회

지난 7월 14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사진 위)가 열리자 그 옆에서 기독교 단체들이 '동성애퀴어축제반대국민대회'를 열고 있다. 뉴시스

한 때 세계는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로 인해 크게 고무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미래 과학 사업을 주도할 최고의 인물로서 추앙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과업에 일부 과오가 들춰지면서, 다시 한 번 그는 세계를 술렁이게 했다. 흥미로운 것은, 황 박사의 뛰어난 연구 성과 및 뒤따른 스캔들에 대한 한국 기독교계의 반응이었다. 불교인인 황 박사와 그를 후원하는 불교계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을까? 그것보다는, 줄기세포 연구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어지럽힌다고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기독교인들은 그 연구를 부정적으로 여겼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과학 기술의 진보에 반감을 표했던 것은 그때만은 아니었다. 먼 옛날 처음 의학적으로 사람간의 장기 이식이 가능하여졌을 때, 서구 기독교의 상당한 목사님들이 장기 이식술을 적극 반대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장기 이식이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지금 기독교계에서 장기 이식을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어기는 이단적 행위로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적극 실현하는 큰 덕망으로까지 여긴다. 헌혈도 마찬가지다. 처음 헌혈이 시행되었을 때, 아니나 다를까 목사님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교회에서 헌혈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뒷북치기’를 너무 자주 하는 것 아닌가? 무엇이든 교회 자신의 전통과 정서에 비추어 보아 거북하면, 너무 숙고 없이 반대하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세월이 흘러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끄러운 집단으로 전락할 것 같으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것은 아닐까? 한때 여성은 교회 강대상 위에 올라가지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여성 목회직도 받아들이는 추세다.

‘뒷북치는’ 교회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여자의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모두들 잘 알고 있다. 오죽하면 어버이날 부르는 노래의 첫 가사가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일까? 남자들이 아프다고 호들갑 떠는 포경수술은 여자들에게는 그저 쌍꺼풀 수술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말이 있는데 그게 곧 ‘순산’이다. 이 세상에 ‘순하게’ 아기를 낳는 여자는 없다. 그래서 현대의학은 산통을 겪다가 체력이 떨어지는 산모들을 위해 ‘무통분만’을 개발했다. 그 덕에 많은 산모들이 고통을 좀 덜고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영국에 처음 무통분만 시술이 소개되었을 때, 역시나 목사님들이 그 무통분만 시술을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에 해산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는 기록이 창세기에 있기 때문이란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창세기 3:16) 그래서 여자가 고통 없이 분만하는 것은 창조 섭리에 어긋난다고 목사님들이 외쳤던 것이다. 그러자 당시 영국의 여성단체들은 극한 분노로 떨쳐 일어나 그 목사님들을 향해 덤벼들었고, 결국 무통분만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참 우스운 이야기 같으면서도 낯 뜨거워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어디에 무통분만이 비성서적이기 때문에 시술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사님이 있을까? 언젠가 기독교는 다시 한 번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줄기세포 연구를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받아들일지 모른다. 그 연구의 결과로 우리들의 사랑하는 자녀, 아내, 친지, 부모, 친구, 성도들이 치명적인 장애와 병마를 극복하여 새 삶을 되찾게 된다면, 아마 줄기세포 연구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까지 할 것이다.

E. J. 페이스의 1924년작 '내리막길을 걷는 현대인들'. 점차 무신론자가 되어가는 현대인을 그렸다. 무신론자가 늘어나는 건 교회가 너무 많이 뒷북을 쳐서 아닐까.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휠체어에서 일어나고 안보이던 눈이 열리고 죽어가던 장기가 살아난다면, 줄기세포 시술이 자신을 살리기를 간절히 기도할 게다. 그 날이 오면 다시 한 번 목사의 얼굴은 붉혀질 것이다. 마치, 수백 년 전 교회가 정죄하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불과 얼마 전에 사면시켰던 교황의 낯 뜨거운 얼굴처럼 말이다.

여성목사, 동성애는?

물론 세속적 이슈에 기독교가 무조건 처음부터 동의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금 당장 정서상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진지하게 연구하여 보지도 않고, 그래서 미래를 읽어볼 능력이 없어서 무조건 반대를 하는 것은 또 다시 교회의 얼굴을 낯 뜨겁게 할 것이다. 여성 목사직 문제나 동성애 문제 등도 지금의 정서상 교회에게 불편한 이슈일 수 있다. 그것에 반대를 하든 찬성을 하든, 이런 이슈들에 대한 진지한 점검과 접촉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작정 혐오에만 앞장선다면, 언젠가 꼭 다시 얼굴 붉어질 일이 올 것이다.

차세대 교회의 지도자가 될 젊은 목회자 디모데가 있었다. 스승인 바울이 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권면이 있다. “아무도, 그대가 젊다고 해서,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성경을 읽는 일과 권면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면서, 결국 “그대가 발전하는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십시오.”(디모데전서 4:12-14) 자기 혼자 발전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 발전이 보여야 하는 것이다. 아마 바울은 지금의 교회도 사회를 향해 그 진보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은 오랜 세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늘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Guardian)을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장기간 있었으면서도 세계정세를 파악하는 데에는 뒤처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만델라는 그 신문이 자신이 감옥에 있으면서도 전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준 창문과 같았다고 고백했다. 가디언은 한 때 이 이야기를 어지간히도 많이 선전했다. 그 선전에 감동을 받아 나도 열심히 읽었다.

발전하는 모습 보이라

그 신문을 읽던 식견으로 보자면 21세기의 여전한 화두는 환경 문제와 뜨거운 중동 문제라 할 수 있다. 전 세계의 정치, 사회, 문화계의 지도자들이 온통 환경과 중동 문제로 목소리를 높이고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가오는 세대도 환경과 중동이라는 두 질환으로 인해 크게 신음할 터인데, 아파하는 이 지구 공동체를 위해 기독교는 무슨 기여를 해야 할 것인가? 교회는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왔는가?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해 교회가 앞장 서서 이슈를 제기하고 문제 해결에 나설 수는 없는가.

많은 단체들이 환경보호를 위해 물류 재활용, 대체 에너지 개발, 아마존 산림 보호 운동,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여러 대책 강구를 하고 있다. 교회도 사회와 발맞추어, 아니 더 앞서 가서 친환경적 물류와 자재로 교회를 세우고, 교회 휴지나 종이는 하얀 새것 보다는 재활용품을 사용하는 등,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지는 않을까? 사회가 이러한 문제로 흉흉할 때에 교회는 이런 이슈에 대하여 예언자적 메시지를 던질 준비가 되어있는가?

거의 30년 전인 1990년, 서울 잠실에서는 세계침례교대회가 개최되었고 전 세계 수많은 침례 교인들이 그 자리에서 여러 행사를 가졌다. 나는 당시 자원 봉사자로서 그 대회를 돕고 있었는데, 무척 인상에 남았던 워크숍이 있었다.

앞서가는 교회가 되라

미국의 어느 신학교 기독교 윤리학 교수님 한 분이 강연을 하였는데, 그 강연 주제가 ‘핵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신학교 학부생이었던 나에게는 기독교 윤리학 강연으로 핵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 무척 의아했고 심지어 쓸데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로 10년 뒤 21세기 초반, 전 세계는 파키스탄과 인도, 북한의 핵 문제로 무척 소란스러웠다.

당시 그 교수님의 핵 문제 강연을 들었던 목회자 분들은 아마도 10년 후에 닥쳤던 세계 핵 위기의 구조적 문제를 누구보다 더 잘 파악하시고 더 심도 있게 기도하셨을 게다. 더 나아가 많은 사회인들이 세계의 핵 문제에 대하여 혼란스러워 할 때에 그 강연을 들었던 목사님들은 그들에게 유용한 조언도 줄 수 도 있었을 것이다.

미래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하여 뒷북만 치는 교회가 될 것이 아니라, 마치 오페라의 서곡처럼, 가장 선두에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기독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한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관련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