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일 농성 끝에 받았던 약속
단협 등 물거품 되자 다시 올라가
그새 굴뚝 높이 75m로 높아져
식사ㆍ배터리 담긴 밧줄만 분주
[저작권 한국일보] 서울 양천구 서울에너지공사 열병합발전소 굴뚝에서 홍기탁 금속노조 파인텍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이 사측의 합의 이행과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지난해 11월 12일부터 고공농성 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양천구에 위치한 서울에너지공사 열병합발전소 3번 굴뚝. 지난달 28일 오전 10시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오자 한 사내가 빨간 가방을 단단히 묶는다. 수차례 줄을 당겨 신호하자 가방이 천천히 굴뚝을 오른다. 아침과 물수건, 휴대폰 배터리가 담겼다. 오늘 메뉴는 오징어덮밥이다.

‘전주 택시 농성’에 이어 두 번째로 긴 고공농성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이다. 홍기탁(45) 금속노조 파인텍지회장과 박준호(45) 사무장은 지난해 11월 12일 사측의 약속 이행을 요구하며 굴뚝에 올랐다. 1일로 294일째, 7일이면 300일을 맞는다.

동료들의 식사를 나른 차광호(48) 전 지회장은 2015년 7월 8일 ‘슬픈 신기록’을 세웠던 당사자다. 408일 최장기간 고공농성 끝에 당시 사측과 합의하면서 굴뚝에서 내려왔지만, 이젠 그에게 음식을 준비해주던 동료들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새 굴뚝 높이는 45m에서 75m로 높아졌고, 농성자는 1명에서 2명으로 늘었다. 의지할 동료는 11명에서 5명으로 줄었다.

[저작권 한국일보]김옥배 파인텍지회 수석부지회장이 고공농성 중인 동료들에게 전할 물품을 담은 가방을 밧줄에 단단히 묶고 있다. 송은미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달 28일 목동 열병합발전소 75m 높이 굴뚝 위로 식사와 생필품을 담은 물품이 밧줄에 매달려 올라가고 있다. 송은미기자
408일 굴뚝농성 끝 노사 합의 했지만

차씨 등은 2001년까지 폴리에스테르 원사 생산량 국내 1위였던 경북 구미의 한국합섬에서 일하던 동료들이다. 2007년 섬유산업 침체로 회사가 파산하면서, 2010년 광고용 섬유 제조사인 스타플렉스가 새 주인이 됐다. 모기업 스타플렉스는 한국합섬 근로자 100여명의 고용을 승계하고 사명을 '스타케미칼'로 바꾼 뒤 2011년 4월 공장 가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2년이 채 안 된 2013년 1월 2일 사측은 경영난을 이유로 공장 가동 중단을 선언했고 전 직원을 상대로 권고사직이 시작됐다. 차씨 등 11명은 ‘회사가 위장폐업을 한다’며 끝까지 거부했고 ‘스타케미칼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해복투)'를 구성했다.

핵심 설비가 빠져나가며 공장 철수가 본격화되자 차씨는 이를 저지하려 2014년 5월 27일 맨몸으로 공장 안 굴뚝에 올랐다. 사태가 장기화되자 부담을 느낀 사측이 교섭에 나섰고 양측이 합의하면서 농성은 408일 만에 종료됐다. 합의서 내용은 ▦별도 신설법인을 만들어 고용을 보장하고 ▦단체협약은 2016년 1월 안에 체결한다는 것이다.

새 회사 파인텍은 충남 아산에 세워졌고 강민표 스타플렉스 전무이사가 대표를 맡았다. 구미를 떠나지 못한 3명을 제외한 8명이 2016년 1월 첫 출근했다. 그러나 1월까지 체결하기로 했던 단체협약은 속도가 나지 않았다.

당시 월급은 시급 ‘최저임금(당시6,030원)+1,000원’ 기준으로 만근을 해도 130만원대, 4대보험 빼면 110만원 수준이었다. 월 250만원, 잔업을 하면 300만원까지 받던 스타케미칼 시절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근무 환경도 열악했다. 고향을 떠나 24시간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밥은 하루 한 끼만 줬다. 작은 TV 하나 없었다.

단체협약에서 임금을 포함한 근로조건을 새로 정해야 했지만 사측은 “회사 규모가 작아졌으니 임금과 복지를 이전 수준으로 맞춰줄 수는 없다"고 했다. 차 씨는 “‘최저임금+1,000원’은 공장을 세운다는 약속을 안 지켰을 경우 무조건 지급하기로 했던 것이고, 실제 임금은 체결하게 될 단체협약에서 정하기로 했던 것”이라며 “사측에서 합의한 약속을 어겼다”고 했다. 김옥배(41) 수석 부지회장은 “당시 동종업계는 최소 월 200만원, 외국인노동자도 160~170만원은 받았다”며 “최소한의 먹고 살 조건을 요구했지만 회사는 돈에 대한 건 일절 안 된다고만 했다”고 말했다. 견디다 못한 3명이 회사를 떠났다.

결국 공장가동 10개월 만인 2016년 10월 파업에 돌입했지만 회사측은 이듬해 8월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다며 기계를 빼고 공장을 비웠다. 이들이 돌아갈 공장마저 사라졌다.

김유정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사업을 성실히 꾸리겠다는 전제에서 합의서를 꾸린 것인데 회사가 이렇게 교묘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는 “노조 요구는 경영상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열악한 근로조건을 조성해 스스로 떠나도록 전략을 짠 것 같다”며 “어쩔 수 없이 파업에 나서자, 이를 구실로 공장을 없애고 그대로 고사시키려는 작전”이라고 했다. 노조 측은 애당초 스타플렉스의 한국합섬 인수는 ‘먹튀 전략’이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감정평가 800억이 넘는 회사를 399억에 인수했는데, 기계ㆍ부지를 팔면 남는 장사니까 산 것이다. 처음부터 공장도 50%밖에 안 돌렸다”라며 “첫 번째 농성 때 합의한 것도 공장 처분을 위해 우리를 구미에서 내보내려던 의도”라고 말했다.

그리고 2017년 11월 12일 새벽 73년생 동갑내기 2명이 다시 굴뚝에 올랐다. 열병합발전소인지도 몰랐다. 그저 굴뚝이 있었고 스타플렉스 본사가 보이는 위치라 택했다. 실제로 보니 너무 높아 놀랐지만 여기가 아니면 없었다. “워낙 절박하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지막 수단이었다.”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에서 10개월째 농성 중인 박준호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사무장이 노트에 그린 굴뚝 위 도면. 폭이 80cm 밖에 되지 않는 공간이다. 카카오스토리펀딩 캡쳐
기관 중재 노력도 제도적 한계

농성 10개월째를 맞았지만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그간 노사 만남은 지난 2월 고용노동부가 주선한 삼자대면과 지난달 금속노조에서 이뤄진 협상뿐이었다. 노조 측은 파인텍이 자회사이니 모회사인 스타플렉스 김세권 대표가 협상장에 나와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사측은 “스타플렉스는 파인텍과 무관하다”고 반대해 진전이 없다. 무심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울에너지공사가 제기한 퇴거가처분신청을 지난 3월 19일 서울남부지법이 받아들이면서 강제부과금이 매일 50만원씩 쌓이고 있다.

차광호(가운데)씨 등 파인텍 노동자들이 지난 5월 22일 서울 양천구 스타플렉스 앞에서 굴뚝농성 200일(5월30일)을 맞아 청와대까지 오체투지 행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용노동부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중재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주무부처인 천안고용노동청의 이성복 근로개선지도1과 팀장은 “‘1월 중 단체협약을 체결한다’는 조항의 이행 여부를 갖고 노조는 ‘약속을 안 지켰다’고 하고 사측은 거꾸로 ‘안 지킨 게 뭐가 있냐’고 하는데, 단협이라는 게 양측 합의로 체결되는 것이라 노동법상 위반 여부를 판단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스타케미칼의 모기업이었던 스타플렉스에 대한 조치에도 어려움이 있다. 합의서 체결로 노조의 소속이 스타케미칼에서 신설법인으로 바뀜에 따라 스타케미칼의 모기업인 스타플렉스와는 고용단절 효과가 발생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게다가 이 사안은 이례적으로 파업이 사업자에게 압박이 안 되는 경우다. 대부분의 사업장은 파업이 길어지면 회사측 피해가 막심하지만 파인텍은 오히려 근로자가 현장에 복귀하면 사용자가 공장 임대 등 지출해야 할 부분이 생긴다. 사측을 압박 수단이 없으니 첫 번째 농성보다 더 어려운 환경이라는 얘기다.

조영선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이 지난 1월 14일 고공농성 중인 파인텍 노동자들의 인권상황과 건강상태를 살피기 위해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강민표 파인텍 대표는 지난달 29일 통화에서 “고생하지 말고 빨리 내려왔으면 좋겠다”고만 했다. “지금은 길이 없다. 공장도 비워줬다”고 할 뿐 대안 제시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스타플렉스 음성 본사로 출근한다.

노조가 첫번째 농성부터 일관되게 요구했던 ‘스타플렉스 공장 취업’에 대해서는 “그 중 단 1명만 와도 문제가 된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그런 친구들이 오면 혹시 회사가 어려워지면 또 경영자 잘못이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 다른 곳에 새 공장을 만드는 방안에 대해서도 “같은 과정을 반복할 엄두가 안 난다”고 잘라 말했다.

사측은 ‘위장폐업’ ‘먹튀논란’에 대해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강 대표는 “인수대금 399억, 추가투자 180억, 경영 적자를 합해 1,300억원이 들어갔다”며 “스타플렉스에서 번 돈을 스타케미칼에 전부 쏟아부었지만 손해가 막심하다”고 말했다. 이어 “우수납세자였는데 3년 만에 특별세무조사까지 받았다”며 “나라가 불법한 사람은 보호하면서 합법적인 기업은 못살게 군다”고 주장했다.

“최소한 권리 위해 끝까지 버틸 것”

장대비가 쏟아지던 지난달 28일 굴뚝 위 홍씨는 “아직 괜찮다”고 말했다. 영하 22도까지 떨어진 혹한과 올여름 폭염을 견뎠다. 발에는 여전히 동상 증상이 남아있지만 동료를 걱정했다. “위에서는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배면 버틸 만하지만 밑에선 매일매일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니 스트레스가 엄청날 거에요.” 홍씨 등의 건강상태를 점검하러 세 차례 굴뚝에 올랐던 오춘상 오씨3대한의원 한의사는 “체중과 근육이 많이 빠졌다”며 “몸 여기저기서 이상신호가 오지만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차씨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했다”며 “노동자로 살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를 찾기 위해 동료들만 괜찮다면 끝까지 버틸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 ’농성할 시간에 딴 일이나 찾아보지’ ‘귀족 노조’라는 비판이 있는데, 저희처럼 최저임금 수준의 처절한 처지의 노동자가 훨씬 많습니다. 저 사람들이 왜 굴뚝에 오를 수밖에 없는지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습니다.”

송은미기자 mysong@hankookilbo.com

[저작권 한국일보] 오춘상 오씨3대한의원 한의사씨가 지난 28일 파인텍 고공농성 지원을 위해 세워진 천막에서 노조원에게 약침을 놓고 있다. 송은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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