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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시민이 낮춘 보도턱

입력
2018.08.30 18:3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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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 안.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나는 자전거 뒤를 잡고 함께 뛴다. “놓는다!”, “놓지마!”, “잡았어!”, “놓은 것 아니지?” 따위의 대화가 반복되면서 아이는 조금씩 균형을 잡아갔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자전거 잘 타네!”라는 응원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아이는 우쭐해서 자전거 패달을 더 세게 밟았고, 난 그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아이의 자전거 실력은 늘어갔다.

아이의 자전거 보조바퀴를 뗀 지도 1년이 지났다. 요즘엔 주말이면 아이와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리 집에서 강변의 자전거도로까지 가려면 찻길을 하나 건너야 한다. 횡단보도 앞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자전거를 끌고 길을 건넌다. 횡단보도에는 보도턱이 낮춰져 있어 어린 아이도 자전거를 끌고 지나가는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원래부터 횡단보도 보도턱이 낮춰진 것은 아니었다. 1984년 9월 19일,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 장애인 김순석씨는 “도로의 턱을 없애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자신이 바퀴를 이용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턱’의 문제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 문제가 안되는 10센티미터의 보도턱은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끊을 만한 장벽으로 여겨졌다.

당연한 듯 보이는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한 장애인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1999년 6월 28일, 혜화역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하려던 장애인이 추락했다. 같은 해 10월 4일, 천호역 휠체어 리프트 레일의 용접부분이 끊어져 리프트를 타고 있던 장애인이 추락 직전까지 가는 사고가 났다. 2001년 1월 22일, 오이도역 휠체어 리프트가 추락해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크게 다쳤다. 장애인 이동권이 사회문제로 제기됐다. 장애인들은 서울역 선로를 점거하는 등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장애인 이동권 확보의 절실함을 사회에 호소했다. 또한 휠체어 장애인들의 ‘지하철 타기’ 등 이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상적으로 하는, 투쟁이라고 볼 수도 없는 활동으로 장애인들의 이동권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증명해 보였다. 휠체어 장애인들의 ‘지하철 타기’ 행사는 열차를 지연시켰다. 그들이 한 것은 그저 ‘지하철을 탄 것’뿐이었지만, 장애인의 이동권이 고려되지 않은 지하철 운행은 장애인이 지하철에 ‘탄 것’만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곧이어 ‘장애인도 버스를 탑시다!’라는 버스를 ‘타는’ 행사를 했다. 장애인이 버스를 ‘타려’하자 버스는 출발하지 못했다. 100만인 서명운동과 서울시청앞과 서울역 앞에서 한 달간 천막농성이 이어졌다. 천막이 강제 철거되자 자신의 몸을 버스에 쇠사슬로 묶는 방식으로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세상에 알렸다.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시청역 선로 점거, 중증 장애인의 단식 농성이 이어졌다. 서울시는 2004년까지 모든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 설치, 저상 버스 도입 추진을 위한 협의회 구성, 중증 장애인의 이동 지원을 위한 리프트 장착 콜택시 100대 도입을 약속했다. 단식 농성은 39일 만에 끝이 났다.

장애인들의 노력과 별도로 시민사회에서도 시민의 ‘보행권’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이 90년대 중반부터 있었다. 장애인단체와 시민사회단체는 지자체의 임의적인 정책을 넘어 이동권 확보를 위한 법률의 필요성을 느끼고 법률 제정 운동에 들어갔다. 2005년 1월,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 길고도 과격할 수밖에 없었던 장애인들의 외침으로 얻고자 했던 것은 단지 ‘나도 이 도시를 걷고 싶다’는 것이었다. 횡단보도의 보도턱이 하나 둘씩 낮춰졌다. 그렇게 낮춰진 보도턱을 우리 아이의 자전거도, 옆집 아이의 유모차도, 가게 주인의 손수레도 지나간다. 시민이 낮춘 보도턱을.

최성용 도시생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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