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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레거시의 힘

입력
2018.08.29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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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거시(legacy)는 대를 이어 계승되고 지속되는 과거로부터의 유산과 전통을 일컫는다. 이는 단순한 물질적 유산을 넘어서 정신적 유산을 포함한다. 레거시 위에 서 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긍감이고,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가장 높은 존중이다. 많은 집단에서 전통과 뿌리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레거시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존경은 고사하고 쉽게 물려받은 부를 바탕으로 무례하고 거만한 언행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례들이 연이어 보도되기도 하고, 특혜와 금수저 논란이 중첩되기도 한다. 계보를 따지는 일은 고리타분한 족보를 들추는 귀찮은 일로도 보인다.

주위에서 레거시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역사적 배경에 있다. 일제강점기와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개인이나 집단의 기존 레거시들 상당수가 사라졌다. 광복 이후 새로 형성된 정치체제와 급속한 경제 발전을 통해 몇 세대의 레거시가 누적되기 시작했지만, 압축성장의 이면에서 권력과 부의 축적에 대한 정당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레거시의 부정은 종종 정의와 공평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정치적 변동과 정체성 혼란은 레거시의 창출을 더 어렵게 해 왔다. 상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상대 진영을 제압하는 효과적 수단이 돼 왔고, 새 정권이 들어올 때마다 기존 정권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 됐다. 거기에 더해 여러 기득권층의 부패와 무능은 몰락을 자초했고, 스스로의 레거시를 지켜내지 못했다. 정해진 주인이 없는 기업과 조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충성을 맹세하며 리더 자리를 물려받자마자 자신을 키워준 전임자를 물어뜯는 경우도 숱하게 발생했다.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자신에게 불과 몇 년 뒤 돌아올 일은 자명하다.

레거시에 대한 수용성이 극히 낮아진 사회적 분위기는 더 확대돼 왔다. 사회의 형평성을 개선시키는 노력은 진전을 보여 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있어야 할, 남겨져야 할 레거시들마저도 이 와중에 함께 없어지기도 하고, 새 레거시를 만들어야 할 주체들은 더욱 몸을 사리게 되는 부작용도 발생했다. 레거시의 부재를 소리 내어 말하는 것마저도 쉬쉬하게 됐다.

레거시를 만든다는 것은 때론 고통스러운 일이고, 철저한 자기관리를 요구한다. 이는 단순히 돈이나 정치적 기반을 키우고 물려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자식이든 후임자든 뒤에 올 사람들을 부단히 키워내고 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가능하다. 다음 세대 역시 더 많은 책임감과 통제를 스스로 지고 행동해야 한다. 자기 이름 석 자와 조직의 이름 하나를 지키고 물려주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희생해야 한다.

며칠 전 학문적 기반이 척박하던 시절, 당시로선 적지 않은 금액을 쾌척하며 장학퀴즈를 만들고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해 수많은 인재와 학자들을 키워낸 고(故) 최종현 SK그룹 회장의 뜻을 기려 그다음 대에서 새로운 학술원을 설립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 레거시가 큰 결실을 보기를, 또한 훌륭한 레거시를 만들어 낼 주체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존경받아야 할 레거시들은 아직 사회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레거시는 어느 한 개인이나 조직이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변동과 사회적 변혁을 바라보며 언제까지 분노와 부정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레거시는 개인과 사회가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보다 성숙되고 진전된 사회를 위해서는 레거시의 힘을 믿어야 하고, 가치 있는 레거시를 만들어 내야 한다. 준엄한 책임의식을 지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요구하는 동시에 깊은 뿌리를 내린, 그리고 시간과 노력이 축적된 레거시를 존중해 주는 사회적 수용성이 더 커질 필요가 있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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