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똥' 권정생이 남긴 안동 동화나라, 그리고 결이 닮은 인연들

안동 일직면 조탑리 권정생 생가. 밖을 내다보기 위해 문 살에 붙인 손바닥만한 유리로 들여다본 방안엔 그의 사진과 꽃다발, 향로 등이 놓여 있다. 안동=최흥수기자

기념비적 건물이나 내세울만한 유물이 없으면, 그 정신만 말갛게 남는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의 동화작가 권정생(1937~2007)의 흔적과 인연을 찾아가는 여행이 그렇다. 파고 들다 보면 한국 정신 문화의 수도라 자부하는 안동의 또 다른 맥에 닿는다.

‘반달의 윤석중 옹이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 새싹문학상을 주시겠다고 / 안동 조탑리 권정생 선생 댁을 방문했다(중략) / 권 선생님 왈 / "아이고 선생님요, 뭐 하려고 이 먼 데까지 오셨니껴? /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한 게 / 뭐 있다고 이런 상을 만들어 / 어른들끼리 주고받니껴? / 내사 이 상 안 받을라니더..."(중략) / 다음날 이른 오전 / 안동시 일직면 우체국 소인이 찍힌 소포로 / 상패와 상금을 원래 주인에게 부쳤다’. 시인 김용락이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문예미학사, 2008)에서 전한 권정생과 관련한 일화다.

조탑리 생가와 권정생동화나라

권정생의 생가는 상상했던 것보다 초라했다. 중앙고속도로 남안동IC로 나오면 첫 번째 마을이 그가 평생 글을 쓰며 보낸 조탑리다. 차 한 대 겨우 들어갈 마을 골목을 통과하면 길은 더욱 좁아지고, 조금 더 걸으면 길모퉁이에 그의 생가가 나온다. 부엌을 포함해 두 칸짜리 흙벽 오두막이다. 낡은 함석과 슬레이트를 덮은 뒷간 주변엔 잡풀이 무성하고, 고욤나무, 산수유, 은행나무에 가려져 집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접은 종이에 못질을 해 ‘권정생’이라 쓴 문패를 방 문 위에 달았지만, 너무 작아 알아보기 힘들다.

두 칸짜리 흙벽 권정생 생가. 유명 동화작가의 집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단출하다.
마당 한 귀퉁이에 있는 뒷간 주변엔 잡풀이 무성하다.
문 위에 조그맣게 쓴 문패. 되도록 소박하게 살고자 한 그의 모습이 엿보인다.
현재 일직교회의 종탑은 권정생이 종지기 하던 때의 그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문 앞에 놓은 방명록에는 전국에서 온 이들이 흔적을 남겼다. 문은 잠겨 있지만, 문살에 붙은 손바닥만한 유리를 통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역시 작은 상 위에 그의 영정 사진이 놓였고, 아래에는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없는 꽃다발과 향로가 놓였다. 그리고 바로 옆 책장에 책 몇 권을 얹은 것이 전부다.

규모는 말할 것도 없고 짜임새와 꾸밈이 유명 작가의 집이라 하기에 턱없이 단출하지만,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풍족한 공간이었다. 평생을 스승이자 친구로 지낸 아동문학가 이오덕에게 쓴 편지에 그는 “이사 온 집이 참 좋습니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어요”라고 적었다. 병치레를 걱정해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줄 테니 과천으로 올라오라는 권유에도 “지금 있는 곳이 가장 좋은데, 어딜 가겠습니까? 혼자 있으면 마음대로 아플 수 있고 참 자유롭습니다”라며 거절했다.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에서). 이 집을 짓기 전 15년간 그는 일직예배당 문간방에 거처하며 종지기로 살았다.

동화작가로 널리 알려진 후에도 그의 ‘자발적 가난’은 계속됐다. 2007년 마을 사람들은 그의 장례식에 전국에서 조문객이 몰려 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병마에 시달리며 골골거리는 독거노인 ‘권 집사’의 재산이 10억원이 넘고, 인세 수입도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 주기 바란다’는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집 뒤 빌뱅이 언덕에 뿌려졌다. 그의 삶처럼 소박하고 야트막한 산이다.

일직면 망호리 일직남부초등학교를 개조한 권정생동화나라.
화단에 ‘강아지똥’ 조형물이 놓여 있다.
젖먹이 동생을 업은 ‘몽실언니’도 동화나라의 주인공이다.
전시실에 놓인 권정생의 오줌주머니. 눈물겹게 아름다운 그의 작품도 그 고통의 산물이었다.
실제 유품으로 조탑리 생가를 재현한 모습. 모든 것이 너무 작아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유머와 안타까움이 배어 있는 그의 유언장이 그나마 제법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애틋함으로 생가를 찾았다가 쓸쓸해진 마음은 약 5km 떨어진 ‘권정생동화나라’에서 다소나마 달랠 수 있다. 2009년 폐교한 일직남부초등학교를 개조한 공간이다. 건물 앞 화단에는 ‘강아지똥’에서 피어나는 민들레, 젖먹이 동생을 업은 ‘몽실언니’, 새끼들을 품고 있는 ‘엄마 까투리’ 등 그의 대표작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사진 찍기 좋게 배치했다.

전시실에는 그의 체취가 묻은 유품과 저작을 모아 놓았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에서 정리한 유품은 모두 6,700여점이지만, 책과 문서가 대부분이고 유품이라 할 만한 것은 400여 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번듯한 물건이라곤 전혀 없어서 교실 한 칸을 채우기도 버거운 수준이다. 생가를 재현한 공간엔 책상을 겸한 소반(정말 작은 상이다), 필기도구, 반창고를 붙인 안경 등이 미니어처처럼 들어 있다. 손수 옷을 기워 입은 천 조각과 반짇고리까지 포함됐고, 유머와 안타까움이 뒤섞인 유언장이 그나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19세부터 앓아 온 늑막염 때문에 평생 몸에 차고 다녀야 했던 오줌주머니를 보노라면 가슴이 찡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더럽다고 무시당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특유의 유머와 오랜 고통의 산물일지 모른다.

건물 앞 연단에 놓인 조형물. 이곳에서 보는 풍경들이 실제 ‘몽실언니’의 무대였다.
권정생동화나라 화단의 꽃 조형물.

먹먹한 가슴으로 전시실을 나와 운동장 위 연단에 서면, 나지막한 산자락마다 옹기종기 들어선 마을이 펼쳐진다. 그 풍경에 ‘몽실언니’의 배경이 된 살강마을도 있고 노루실도 있다. 연단에는 평생의 애틋함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라 쓴 조각 앞뒤로 여인의 얼굴 조형물과 ‘평화통일’이라 쓴 한반도 형상의 설치 작품이 세워져 있다. “이 작은 이야기가 통일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고통스럽게 살아온 전쟁의 어린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싶었다”(‘몽실언니’에서 작가의 말)는 뜻이 담겼다.

권정생과 결이 닮은 인연들 ①이오덕과 화목리

권정생동화나라 전시실에는 그의 생전 모습과 인연을 담은 사진들이 여러 장 걸려 있다. 그중에서 중년 남성 7명이 울진 죽변항에서 찍은 사진에는 농부 수필가 전우익, 아동문학가 이오덕, 천주교 안동교구 정호경 신부가 함께 있다. 모두 권정생과 교류하고 친분이 두터웠던 이들로, ‘양반고을’ 안동에서 진보적 사회운동을 이끈 한 축이기도 하다.

권정생과 교류가 깊었던 지역 인사들이 울진 죽변항에서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권정생, 정재돈(전 가톨릭농민회 회장), 전우익, 정호경 신부, 이현주 목사, 이오덕, 권종대(전 전농의장). 권정생동화나라 제공
현서면 초입에 이오덕의 ‘우리고향 화목’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오덕에게 문학적 감성의 토대가 됐던 포플러나무 가로수가 구석들 담벼락에 그려져 있다.

열두 살 위인 이오덕(1925~2003)과 권정생의 만남은 공식적으로 1973년 이오덕이 그의 집을 찾아 간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비공식적 인연은 청송 현서면(행정지명과 상관없이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화목’이라 불렀다)에서 시작됐다. 1946년 해방을 맞아 귀국한 권정생은 외삼촌이 살던 이곳에서 5개월여 화목국민학교를 다녔고, 이곳이 고향인 이오덕도 그 무렵 같은 학교 교사였다. 이래저래 마주쳤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박효일 화목교회 원로 장로는 두 사람이 교회 주일학교에서도 사제지간이었다고 말했다. 권정생이 살던 ‘댓골’과 이오덕의 집이 있던 ‘구석들’은 200m가량 떨어져 있어, 권정생이 집으로 찾아가 글을 배웠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책 어디에도 그런 인연을 밝힌 적이 없으니 단정하기는 힘들다.

이오덕의 작품으로 장식한 구석들 담장.
건물 외벽에도 동화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현 화목국민학교 교가도 이오덕이 지었다.

이오덕은 ‘우리고향 화목’이라는 시에서 ‘일찍이 의성군은 사곡면과 춘산면, 안동군은 길안면, 청송군은 안덕면까지 세 고을 다섯 면에서 슬기로운 소년들 책보 들고 학교로 모이고, 어른들은 장터로’ 모인 아름답고 평화로운 산천이라고 자랑했다. 화목은 해발 340m 고지임에도 들이 넓어 평온한 느낌을 준다. 제방을 따라 늘어선 포플러나무 가로수와 그 아래서 염소에게 풀을 먹이던 추억은 그의 문학적 감성에 녹아 들었다. 더 이상 그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의 작품은 구석들 마을 담장 곳곳에 그림으로 남았다. 집과 밭이 이웃하고 있어 골목이라 할 수도 없는 길을 따라가면 한가한 농촌마을 풍경 자체가 작품이기도 하다. 권정생의 ‘몽실언니’의 한 대목도 그려졌다. 소설에서 밀양댁이 재가한 ‘댓골’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권정생과 결이 닮은 인연들 ②정호경과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권정생이 사후 재산 관리인으로 지목한 3인 중 한 사람이 정호경 신부(1941~2012)다.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르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했던 그는 1994년부터 봉화 명호면 풍호리 비나리마을에 들어 앉았다. 정재돈 전 가톨릭농민회 회장은 한 신문사 기고에서 ‘입품 그만 팔고 몸으로 살련다’고 작심하고, 낮에 농사짓고 밤이나 농한기에 책을 쓰며 ‘돈 없이도 즐겁게 사는 삶’을 보여 주었다고 회고했다.

봉화 명호면 비나리마을 달이네 집. 정호경 신부가 기술자의 도움으로 손수 지은 집이다.
비나리의 지형은 남성미가 느껴지는 청량산 자락에서 보기 드물게 부드럽다.
비나리마을은 봉화에서도 ‘귀농일번지’로 통한다. 새로 지은 집이 제법 많다.
비나리 마을 길은 자체로 훌륭한 산책로다.

비나리에서 그의 삶은 권정생의 동화 ‘비나리 달이네 집’ 소재가 됐다. 달이는 정 신부가 기르던 개로, 산짐승을 잡으려고 놓은 덫에 앞다리 한쪽을 잃어 ‘삼족선사’라고도 불렀다. 권정생은 정 신부가 손수 지은 통나무집에서 하룻밤씩 묵어가곤 했다. 현재 주인 없는 집 앞에는 ‘비나리 달이네 집’이라는 알림판만 남아 있다. 교구청의 경제적 지원도 거절하고, 20년 가까이 혼자 힘으로 유기농법으로 농사 지은 그의 청빈함과 유머도 권정생과 결이 닮았다. 권정생이 새싹문학상 상패와 상금을 되돌려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그는 "영감쟁이, 성질도 빌나다 / 상패는 돌려주더라도 / 상금은 우리끼리 나눠 쓰면 될 낀데..."라고 했단다.

정호경 신부가 들어 온 무렵부터 비나리마을은 봉화에서도 ‘귀농 일번지’로 알려져 지금은 귀농인을 더 받을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우람한 청량산 자락에 함지박처럼 부드럽고 넓게 파인 지형은 누가 보더라도 아늑하고 푸근하다. 돛단배처럼 마을 중앙의 볼록한 산봉우리도 멋있고, 산 중턱까지 연결된 마을 길을 걸으면 일부러 낸 걷기 길 못지않은 풍광을 자랑한다.

권정생과 결이 닮은 인연 ③전우익과 야옹정

권정생과 전우익(1925~2004)의 만남은 1976년 조탑리에서 시작된다. 권정생은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이오덕 선생님과 함께 오셨을 때 너무 닮아 쌍둥이는 아니라도 사촌쯤 되는가 싶었습니다”라고 했지만, 정작 전우익의 철학은 자신과 더 닮아 있다.

전우익의 선대부터 500여년 이어온 봉화 상운면 구천마을 야옹정.
정자 마루에 퇴계가 지은 야옹정운(野翁亭韻)이 걸려 있다.
마을 입구에 옥천전씨가 이곳에 들어온 내력을 적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신경림 시인은 전우익의 수필집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2004, 현암사) 추천사에서 그를 ‘깊은 산속의 약초 같은 사람’이라 표현했다. “덜 먹고, 덜 입고, 덜 갖고, 덜 쓰고, 덜 놀고, 이러면 사는 게 훨씬 더 단순화될 터인데요. 쓰레기도 덜 생기고, 공해니 뭐니 하는 문제도 상당히 해결되겠지요. 풍요가 덮어놓고 좋은 것만 같지는 않아요”라는 말은 곧 그의 삶의 철학이기도 했다.

전우익은 이름과 달리 평생을 좌익으로 살았다. 남부럽지 않은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경성제국대학을 중퇴하고, 광복 이후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에서 활동하다 6.25전쟁 이후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6년 남짓 징역을 살았다. 이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틈만 나면 허름한 가방에 추수한 농산물을 넣어 전국의 재야 인사를 찾아 다니며 교류했다.

봉화 상운면 구천마을 그의 집에는 선대인 전응방(1491~1554)이 지은 야옹정(野翁亭)이라는 정자가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전응방은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조부의 유훈에 따라 관직에 나가지 않고 퇴계 이황과 강론했다. 온돌방까지 갖춘 정자 마루에는 이황의 야옹정 운(韻)이 걸려 있다. 바로 앞으로 개천이 흐르고 있을 뿐, 구천마을은 크게 경치가 빼어나지는 않아도 전우익의 삶처럼 정갈하다. 인구가 줄어드는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조용한데, 마을 입구 노송 아래 옥천 전씨가 구천리에 들어온 지 500년이 됐다는 비석만 유난히 커 보인다.

안동=글ㆍ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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