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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솔릭 예보는 설레발?

입력
2018.08.26 17:00
수정
2018.08.27 14: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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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덮친 태풍 가운데 최악의 재산손실을 입힌 것은 2002년 8월 말 내륙을 물바다로 만든 ‘루사’로, 피해액만 5조1,479억원에 달했다. 당시 경북 울진군도 쑥대밭이 됐는데, 졸지에 집과 농작물을 날려보낸 주민들은 망연자실한 채 하늘만 원망했다. 이 소식을 접한 강원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울진촌 주민 28명이 서둘러 햅쌀 200포대를 들고 울진을 찾았다. 40여년 전 피눈물을 삼키며 이 땅을 떠났던 사람들이었다.

▦ 1959년 9월 추석 연휴에 남한을 강타한 태풍 ‘사라’는 849명 사망ㆍ실종이라는 최악의 인명 피해와 함께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도 되지않던 시절에 1900억원이 넘는 재산을 앗아갔다. 37만명을 넘었던 이재민이 참상을 대변한다. 당시 강원도에 속했던 울진군도 초토화돼 주민들은 복구는 엄두도 못낸 채 수개월을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하며 추위에 떨었다. 이때 강원도가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휴전선 부근에 주인 없는 논밭이 널려있는데 그 곳으로 이주해 땅을 개간하면 도와 군이 장비는 물론 식량까지 배급하겠다는 것이었다.

▦ 다른 선택이 없었던 울진 주민 66세대 364명이 군용트럭을 타고 도착한 곳이 지금의 마현리다. ‘이성주 건강편지’ 등 관련 자료에 의하면 잡초 우거진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은 처절한 전투였다. 장비와 식량 약속도 오간 데 없었다. 지역을 지배하는 군대의 횡포와 갑질은 견딜 수 있었으나 ‘금쪽 같은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땅을 빼앗아 갈 때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모아 땅을 되사거나 임대해 농사를 짓고 살림을 키웠다. 우렁이 농법으로 생산한 친환경 오대쌀은 전국 명품이 됐고, 품종을 개량한 토마토 파프리카 등은 대박을 쳤다.

▦ 마현리 청년회는 1989년 8월 마을 어귀에 ‘무에서 유를 창조한’ 선대의 피땀어린 개척역사를 새긴 기념비를 세웠다. 루사 피해를 입은 고향을 찾은 여정은 비극과 재난이 어떻게 인간정신을 고양하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6년만에 한반도를 관통한 태풍 ‘솔릭’의 경로를 잘못 예측해 공포를 조성했다고 기상청이 몰매를 맞았다. 온라인에는 ‘솔릭’을 ‘행방이 묘연해 기다려도 오지않음 혹은 설레발이 지나침’으로 풀이한 비아냥도 나돈다. 태풍이 수도권만 비켜가면 끝인가. 넋놓은 농어민의 아픔을 외면하는 공감결핍증이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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