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민주주의 시대로] <5> 블록체인 민주주의, 더 나은 민주주의인가

영국 투표개혁 이끄는 청년 싱크탱크 ‘웹루츠 데모크라시’
영국의 정치 싱크탱크 '웹루츠 데모크라시'의 아리크 차우더리 대표가 지난 6월 25일 런던 테크허브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런던=강유빈 기자

“블록체인 투표가 차세대 시스템으로 주목되는 건 사실이지만, 가상화폐 붐 탓에 갑자기 주류로 부상한 느낌도 지울 수 없어요. 사용자 공급자 모두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는 평가ㆍ인증 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6월 25일 런던 금융의 중심인 무어게이트역 인근에 위치한 ‘테크 허브’(Tech Hub) 내부는 젊은 테크 스타트업 창업가들로 붐볐다. 대부분 공학도일 이들은 회의실에 삼삼오오 모여 정보를 공유하고, 다시 흩어져 개발에 몰두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20대 인도계 청년만은 전혀 다른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영국의 정치 싱크탱크 ‘웹루츠 데모크라시’(WebRoots Democracy)의 아리크 차우더리(Areeq Chowdhury) 대표다.

차우더리 대표는 이곳에서 영국의 정부 관계자, 석학들과 ‘투표시스템 현대화’와 관련된 공동 연구를 진행하며 영국의 선거개혁을 주도하고 있었다. 지난 3월 스코틀랜드 정부가 온라인 투표 파일럿을 추진키로 한 것도 웹루츠 데모크라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스코틀랜드에선 반대 캠페인이 벌어지는 등 반발이 심했지만, 투표시스템 현대화의 효과에 대한 우리 연구보고서는 물론, 학계, 시민단체 관계자 서명이 담긴 서한을 보냈던 게 굉장히 효과적이었다”고 차우더리 대표는 말했다. 이어 그는 “파일럿을 담당하는 스코틀랜드 정부 관계자가 최근 연설을 했는데 내용은 물론 표현까지 우리 자문 내용과 판박이였다”며 웃었다.

차우더리 대표가 선거 개혁에 매달리는 건 기술이 정치 참여를 획기적으로 확대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영국 민주주의를 지키고, 현대화하고, 발전시키려면 기술과의 결합은 피할 수 없는 선택지이며, 투표개혁은 첫 단계”라고 그는 강조했다. 웨일즈 정부 역시 이 기관의 끈질긴 제안을 수용해 온라인 투표를 시범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일정과 방법을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웹루츠 데모크라시는 그간 온라인 투표와 관련된 이슈를 포괄적으로 다뤄왔지만 최근 들어 블록체인 연구 비중을 눈에 띄게 늘렸다. 차우더리 대표는 “블록체인 기술의 가장 큰 특징인 ‘투명성’은 투표의 신뢰도를 끌어올리는 데 효과적”이라며 “요 몇 년 새 민주주의 발전과 분리할 수 없는 이슈로 조명되고 있다”고 말했다.

‘블록체인’ 썼다고 다 좋은 투표시스템은 아냐

하지만 아무리 획기적인 시스템이라도 현실정치에 적용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차우더리 대표는 “블록체인이 만능 열쇠라고 생각하는 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비트코인 유행을 등에 업고 쏟아져 나온 각종 시스템들을 객관적 잣대로 평가하고 쓸만한 것만 걸러내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크라토스 프로젝트(Cratos Project)’는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명칭은 민주주의(democracy)의 어원 가운데 힘과 권력을 상징하는 ‘크라토스’를 따서 지었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온라인 투표시스템에 대한 공신력 있는 평가ㆍ인증 도구를 만드는 것. 웹루츠 데모크라시는 이를 위해 다양한 세부주제 별로 정부, 학계, 시민단체, 개발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주기적으로 만나 토론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투표 시스템 사용자와 공급자 모두를 위한 것이다. 차우더리 대표는 “정부는 온라인 투표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고, 다양한 플랫폼 가운데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있다”며 “개발자들은 크라토스 기준을 만족하고 인증을 받기 위해 시스템의 질을 개선하리라 기대된다”고 말했다. 선거 개혁을 시작한 스코틀랜드, 웨일즈 정부는 물론 영국 중앙정부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도 크라토스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고 토론에 적극 참여해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크라토스 프로젝트는 좋은 투표시스템의 요건을 크게 접근성, 보안, 유용성 세 가지로 나눴다. 특히 블록체인 투표의 경우에는 보안 설계를 세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차우더리 대표는 강조했다. 그는 “블록체인 특유의 투명성은 투표에 있어 양날의 검과 같다”며 “정보가 분산저장, 다수에게 공개돼 외부 조작 시도를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은 물론 장점이지만, 선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자격을 갖춘 유권자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유권자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6월 20일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스코틀랜드여 투표하라'(Vote. Scot) 토론회가 웹루츠 데모크라시 주최로 열리고 있다. 웹루츠 데모크라시 제공
내년 3월 완성이 목표... 등급은 AAA부터 CCC까지

웹루츠 데모크라시가 정한 프로젝트 기간은 내년 3월까지다. 합리적인 기준과 평가체계를 구축해 투표시스템 별로 최고 AAA부터 최저 CCC까지 등급을 매길 수 있게 하겠다는 목표다. 차우더리 대표는 “예를 들면 청각장애인, 재외국민도 투표를 할 수 있는지, 유권자 신상 확인 절차를 잘 갖췄는지, 오픈 소스 시스템의 경우 보안에 취약하지는 않은지 등을 하나하나 체크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평가도구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정부의 투표 개혁 실험에 곧바로 적용할 계획이다.

다만 영국 중앙정부는 투표시스템 개혁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상태다. 웹루츠 데모크라시는 2022년 총선을 변화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셜미디어나 스마트폰 등 디지털 활용에 능한 2000년대 출생자들이 처음 유권자군에 진입하는 선거이기 때문에 시스템 현대화를 밀어붙일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서다.

차우더리 대표는 “온라인과 기존 투표 시스템을 혼용하는 방식으로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누구도 정치참여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50%대를 밑도는 청년투표율은 물론, 현재 1%대에 머무르고 있는 시각 장애인 투표율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접근성이 뛰어난 온라인 투표 도입을 미룰 수 없으며, 멀지 않은 미래에 원하든 원치 않든 온라인 투표로 완전 교체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기술과 정치의 결합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에요. 이 운명을 혼란 없이, 잘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민주주의의 숙제이고, 크라토스 프로젝트가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런던=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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