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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우리는 미래세대 착취의 공범이다

입력
2018.08.2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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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자가 득인 보험은 보험사 손해 끼쳐

적게 내고 많이 받으면 누군가 책임져야

국민연금 고갈 방치 공범되어서는 곤란

국민연금 강남사옥 국민연금공단 서울남부지역본부 강남 사옥. 홍인기 기자
국민연금 강남사옥 국민연금공단 서울남부지역본부 강남 사옥. 홍인기 기자

보험업계에 이런 말이 있다. 최악의 상품은 잘 안 팔린 보험이 아니라, 너무 많이 팔린 보험이라는. 이유가 있다. 흥행에 실패한 보험은 판매를 접으면 그만이다. 상품 개발과 홍보에 들어간 비용 정도만 손해를 보면 그뿐이다. 과도하게 많이 팔린 보험은 얘기가 다르다. 소비자들은 똑똑하다. 낸 돈(보험료)보다 받는 돈(보험금)이 더 많다는 계산이 섰으니 너도나도 보험에 가입하겠다고 달려든 거다. 보험사는 보험을 팔아서 수익을 내야 하는데 되레 많이 팔수록 손실이 쌓이는 구조다.

업계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런 보험상품이 있다. 국내 최대 생명보험사인 삼성생명이 20년 전인 1998년 내놓았던 여성시대건강보험이다. 여성들이 걸리기 쉬운 질환을 집중 보장하는, 당시만 해도 보기 드문 여성 전용 보험이었다. 이 상품의 인기를 부른 건 12개 보장 질환 중 하나인 요실금수술이었다. 가입자들이 50만원 남짓 비용을 들여 미용수술(이른바 이쁜이 수술)을 한 후 요실금수술로 진단서를 첨부하면 500만원의 보험금이 지급된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중년 여성들이 너도나도 몰렸다. 보험료가 월 2만원대였으니 톡톡히 남는 장사였다. 2년간 가입자는 200만명이 넘었고, 회사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결국 삼성생명은 판매를 접고 요실금수술을 보장 내역에서 뺀 새로운 상품을 내놓아야 했다.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 주겠다며 정부가 적극 장려했던 실손보험은 3,000만명이 넘게 가입하는 대히트를 하며 ‘국민 보험’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지만 역시 보험사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병원 치료비를 실비로 전액 보장해 준다니 가입자들은 굳이 찾지 않아도 될 병원까지 가서 치료를 받았고, 심지어 마사지와 흡사한 수십만 원짜리 도수 치료를 하루 2, 3번씩 받고도 보험금을 타가는 이들까지 있었다. 정부가 직접 나서 보장 범위를 대폭 축소하는 극약처방을 내놓고서야 가까스로 불을 끌 수 있었다. 부실한 상품 설계와 계약자들의 도적적 해이가 결합된 결과였다.

요즘 논란이 되는 국민연금(보험)은 이런 보험들과 매우 닮아 있다. 국민연금은 애초 국민의 노후 소득보장이라는 원대한 그림 아래 가입자(국민)가 보험사(국민연금공단)에 비해 몇 배 더 유리하도록 설계된 상품이다. 단지 당장 수혜를 입을 수 없고 일정 연령이 될 때까지 수급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인내가 요구될 뿐. 지금은 국민연금에 강한 불신을 갖는 이들이라도 실제 연금을 받기 시작하면 대부분 큰 수혜를 본다는 건 분명한 ‘팩트’라는 얘기다. 굳이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아도 되는 주부 등 ‘똑똑한’ 임의 가입자들이 해마다 급증하며 40만명을 넘어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대로 두면 국민연금을 운영하는 보험사, 즉 국민연금공단의 적자가 쌓이는 건 당연하다. 지금 600조원이 넘게 쌓여 있는 기금이 불과 40년 뒤인 2057년에 바닥이 날 거라고 예상되는 건 그래서다. 오죽했으면 참여정부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며 연금 개혁을 주도했던 유시민씨가 “적게 내고 많이 받는 연금 구조는 진보ㆍ보수를 떠나 ‘나쁜’ 제도”라고 일갈했을까.

이제 이 상품을 이대로 계속 팔며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지, 지금이라도 과감한 수술을 할지 결정해야 한다. 민간 보험사 상품이야 회사가 손해를 보고 말 일이라지만, 국민연금은 손실을 감당해야 할 주인이 이제 갓 태어난 어린아이, 혹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다.

솔직히 총대를 메야 할 정부와 정치권이 ‘국민 동의’라는 방패 뒤에 숨어 얼마나 적극적일지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미래세대를 착취해 보험금을 받아갈 우리가 그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동의를 해 줘야 한다. 노후 소득보장이 꼭 필요하다지만, 곳간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소득 대체율을 더 높여 달라거나 보험료를 한 푼도 더 못 내겠다는 건 아니라고 본다. 괜히 뜯기기만 하는 건 아닐까 불안한 건 나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미래 세대에 폭탄을 투척하는 공범이 돼서는 곤란하다 싶어서다.

이영태 정책사회부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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